취미가 뭐예요?
내 취미는 음악 감상이다. 하지만 취미로 독서나 음악 감상을 이야기하는 건 이제 너무 식상해지고 말았다. 요즘에는 가죽 공예, 요리, 백패킹 정도는 즐겨줘야 취미라고 부를 수 있으려나. 하지만 나는 정말로 음악 듣는 걸 좋아한다. 집에 있으면 항상 스피커를 켜고, 어디든 길을 나설 때는 이어폰부터 귀에 꽂는다.
내가 자기소개를 할 때 취미에 음악 감상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던 건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다. 집 안에 있던 오래된 LP에 유난히 호기심을 많이 가졌고 매일 같이 뒤적였다. 책보다 더 커다란 사진을 감상하고 가사와 라이너 노트를 차근히 읽어 내려가며 전축에서 흐르는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그저 좋았다.
그러다 스스로 음반을 사기 시작했던 건 1994년부터. 새 나라의 어린이였던 나는 음반을 사기로 결심하고 불량식품 사 먹을 용돈을 조금씩 아꼈다. 그렇게 모은 용돈을 들고, 버스를 타고 레코드 가게에 가서 서태지와 아이들 3집 카세트 테이프를 샀다. 비닐을 뜯고 빳빳한 재킷의 잉크 냄새를 맡으며 카세트를 플레이어에 철커덕 삽입했다. 그 때 흘러나왔던 강렬한 기타 리프의 ‘Yo! Taiji!’부터 진지한 메시지를 담은 ‘발해를 꿈꾸며’를 지나 ‘교실 이데아’의 비판적이고 실험 정신이 가득한 곡들을 지나갔을 때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테이프가 닳도록 음악을 듣는다는 뜻을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랬다. 테이프가 닳아서 끊어지도록 듣고 또 들었다.
걸어 다니면서 듣는 음악
몇 년이 지나자 밖을 돌아다니면서 음악을 듣고 싶었다. 일명 ‘마이마이’로 통했던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갖고 있던 몇몇의 친구들을 본 이후였다. 무척 부러웠다. 마이마이가 가진 탄탄한 사각형 몸과 수많은 버튼들, 건전지를 넣으면 움직이는 모습까지, 남자인 나의 로망을 자극하는 기계적인 매력도 충분히 갖고 있었다. 밥을 먹다가도 눈 앞에 마이마이가 아른거렸고 입으로는 무심결에 마이 마이 마이 마이…를 수없이 되뇌고 있었다.
모아놨던 용돈을 전부 싸들고 백화점을 향했다. 그렇게 1996년 11월 17일은 내 손에 마이마이가 처음 들어온 날이 되었다. 날짜를 아직도 기억하는 걸 보니 기분이 좋긴 정말 좋았나 보다. 정확히는 삼성의 마이마이가 아니라, Panasonic에서 만든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였다. 딱 카세트 테이프 케이스 정도의 크기에 시크한 검은색 위로 반짝이는 실버 포인트가 일품이었다. 베이스 음을 더 풍성하게 꾸며주는 S-XBS라는 기술이 들어있었고, 카세트를 B면으로 굳이 뒤집어 끼워 넣지 않아도 되는 오토리버스 기능도 기본으로 있었다. 두툼한 카세트 테이프를 서너 개씩 가방에 넣고 다니며 음악을 듣고 다녔던 그 때는 그게 불편한지도 모르고 마냥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그리고 다시 몇 년 뒤에는 휴대용 CD 플레이어를 덜컥 샀다. 이유는 간단했다. CD가 카세트 테이프보다 음질이 더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무지개 빛으로 번쩍이는 디스크의 뒷면과 큼직한 재킷도 멋졌기 때문이다. Panasonic 카세트 플레이어를 썼던 정 때문인지 CD 플레이어도 같은 브랜드로 결정했다.
널찍한 커버를 여니 손톱보다 더 작은 렌즈와 눈이 마주쳤다. 잡지에서 보던 미래 로봇 눈의 이미지 같았다. ‘DO NOT TOUCH THE LENS’, 차가운 경고문 스티커까지도 매력적이었다. 흠집이 나지 않게 조심스레 CD를 끼우니 이제서야 진정 내가 음악을 제대로 듣는구나 싶은 만족감이 느껴졌다.
처음 그 CD 플레이어에 넣어서 들었던 음반은 집에 있던 Kenny G의 ‘Montage’ 앨범이었다. ‘GOING HOME’의 미끈하고 섹시한 색소폰 소리에 묘한 흥분감이 솟아올랐다. 카세트 테이프로 듣던 것보다 왠지 정갈해진 사운드. 어딘가 깊은 공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블루지한 곡의 분위기 때문에 꼭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건 아니다. 음악이 울리는 정도가 분명하게 달랐다는 기억이 확실히 난다. 카세트 테이프가 계곡의 물소리였다면, CD는 바다의 파도소리랄까. 집에 갈 때면 어느새 GOING HOME을 듣고 있었다.

국민 이어폰을 만나다
예전의 나는 이어폰에 대한 깊은 개념이 없었다. 그저 제품 박스 안에 함께 들어있던 걸로 자연스레 써왔을 뿐. 이어폰이 고장 났을 때는 난감했다. 어떤 이어폰을 사야 하느냐가 큰 문제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당시 인기 이어폰 중 하나로 MX400이라는 제품이 있었다. 지금도 오디오 브랜드로서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SENNHEISER가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판매하고 있는 제품이기도 하다. 작고 굵은 검은 음표처럼 평범한 외모에 투박한 플라스틱 마감은 ‘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물건임을 직감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끗하고 풍성하게 구웅구웅 울리는 베이스 기타 선율 위로 반짝이며 부서지는 듯한 사운드가 감동을 전해줬다. SENNHEISER는 쿵쾅쿵쾅 박력 있는 저음으로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MX400의 가장 큰 메리트는 뭐니뭐니해도 가격. 저렴한 1만원대의 가격은 누구에게나 구미를 당기게 하기 충분했다고 보인다. 학생 신분이던 나에게도 그랬다. 다만, 소위 짝퉁이라 불리는 가품 역시 판을 치고 있어서, 패키지가 없이 비닐 포장만 된 벌크 제품을 놓고 정품이냐 아니냐 수많은 설전이 오가기도 했다. 그만큼 인기가 많았던 이어폰이란 뜻이리라. 진정한 ‘국민 이어폰’이었다.
그렇게 Panasonic CD 플레이어에 연결했던 MX400으로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의 청명함은 아직도 뇌리에 깊게 남아 있다. 당시에 자주 듣던 음반은, 마왕이라 불렸던 가수 신해철이 이끌던 밴드 ‘N.EX.T’의 4집. ‘Lazenca – A Space Rock Opera’라는 앨범 제목처럼 마치 진보라색 우주를 떠올리게 하는 광활한 프로그레시브 사운드가 팔뚝에 소름을 만들었다. 그게 지금까지도 나에게 SENNHEISER의 음색으로 강렬히 기억되고 있다.
음악을 다시 재미있게 듣고 싶어
컴퓨터로 음악 파일이 여기저기 공유되기 시작한 후, MP3 플레이어부터 근래의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음악을 듣는 방법은 편리하게 변화했다. 음반을 갈아 끼울 필요도 없고, 플레이어를 컴퓨터에 연결해 수백 곡을 넣어 놓으면 버튼을 누를 필요도 없이 화면 몇 번만 터치하면 되니까. 그러나 얻은 만큼 반드시 잃는 게 있다고 했던가. 편리해졌지만 재미와 감동은 줄어들었다. 추억으로 가득 찼던 음악들은 미용실에서 잡지 훑어보듯 손가락에 의해 휙휙 지나쳐갔고, 어느새 음악은 출퇴근 이벤트용 BGM에 불과했다. 음악을 진득히 들을 시간도 사라졌고 음반을 사는 일도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음악을 다시 재미있게 듣고 싶었다. 음악에 다시 추억을 적셔두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을 거듭했다.
2015년 다시 발매되었던 Beatles의 베스트 앨범 ‘1’, 2014년에 다시 나온 Led Zeppelin의 스튜디오 정규 앨범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2014년), 김광석 4집 (2014년)… 이 음반들의 공통점을 아는가? 바로 ‘리마스터링(Remastering)’이다. 발매 후에 수 년이 지나 재발매 되는 음반들은 대개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친다. 아날로그 시대에 녹음된 소리를 CD로 담으면 어딘가 밋밋한데, 그 과정에서 사운드가 생생해지도록 끌어올리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오래 전에 녹음된 음원이라도 최신 EDM처럼 강렬하게 느껴진다. 모든 소리가 또렷해지고, 베이스는 웅장해지고, 비트가 강해진다. 밀도가 높아진다고도 할 수 있다. 그저 볼륨 키우기에 불과하다는 ‘음량 전쟁(Loudness War)’에 대한 논란도 있지만, 리마스터링 된 음반을 오리지널 버전과 비교하면서 감상하다 보면 은근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Beatles의 ‘1’ 앨범에 있는 ‘Eleanor Rigby’는 현악기와 목소리의 배치, 그리고 사운드의 선명함이 초기 버전과는 놀라울 정도로 완전히 다르다. 멤버들이 며칠 전에 다시 모여 재녹음을 한 건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유재하 1집의 2014년 재발매 버전도 그렇다. 첫 트랙 ‘우리들의 사랑’ 도입부의 도로동 도로동 띠디딩 하던 울림은 쿠구궁 쿠구궁 파바밤이 되어 가슴에 강하게 내리친다. 감동적이다.
그 밖에도 오래 전 절판된 희귀 LP를 복각해 리마스터링한 후 CD로 만들어 판매하는 레이블도 속속 등장하는 걸 보면서, 음악의 음질과 사운드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음악을 더 깨끗하고 웅장한 음질로 즐길 수 있다는 건 분명 재미있는 일이 될 거라 느꼈다. 그렇게 결정하게 된 프로젝트는 바로 ‘내게 맞는 음질 좋은 이어폰과 헤드폰 찾기’다.
좋은 음질을 들으며 소리의 찰랑거림, 뭉툭함, 뾰족함 같은 질감을 분석하며 빠져들다 보면 분명히 다시 음악을 재미있게 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장비를 바꿔 음질의 업그레이드를 가장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귀에 직접 소리를 뿌려주는 이어폰이나 헤드폰은 만든 업체마다, 그리고 제품마다 사운드 튜닝 기술이 전부 다르다. 디자인과 소리는 물론, 귀에 끼웠을 때의 느낌까지도. 수많은 제품 중에서 내 취향에 맞는 소리를 들려주는 녀석을 찾는다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그 감상의 과정은 무척 흥미롭다. 음원 자체의 품질도 중요하겠지만, 우선은 음질의 차이를 바로 구분하고 느낄 수 있는 이어폰에 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나는 꽤 많은 제품들을 접해왔다.
2년간의 경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2년이란 세월. 사람들에게 2년이란 시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에게 있어 2년이란 시간이라 하면 군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 시간을 버텼던 나에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다양한 사람을 더 많이 만나며 생각이 넓어졌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고민해보게 되었다. 애니메이션 「One Piece」의 주인공들도 동료들끼리 잠시 헤어지고 2년 후에는 하늘 위로 날아오르거나 날씨를 조종하는 등, 모험에 필요한 능력을 대폭 업그레이드했지 않은가. 힘들긴 했었지만 무사히 마친 후 지금의 나로서 돌아보면, 얻은 것도 많다고 생각한다.
내가 얼리어답터에서 리뷰를 시작한지도 어느새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리뷰 제품 가운데엔 이어폰이나 헤드폰이 상당수였다. 그것들을 오랫동안 사용하며 많은 음악을 이리저리 듣고 느껴왔다. 그 시간 동안 내 귀는 분명 더 트였으리라. 이제는 이 청취 경험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새로운 음악의 세계로 통하는 길을 안내해 주고 싶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이어폰과 헤드폰들은 내가 직접 오랜 시간 들어보고 솔직한 감상으로 선정한 제품들이다.
사실, 어떤 음질이 좋은 것인지에 대한 견해는 개인차가 크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느낀 감상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지만, 다른 누군가는 나의 생각에 물음표를 던질 수도 있다. 게다가 글로써 표현하고 전달하는 소리의 느낌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의 이런 시도가 여러분이 음악을 더 재미있게 들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점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임이 분명할 테니까. 음악을 사랑하고 음반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던 당신은, 지금 무엇으로 어떻게 음악을 듣고 있는가?
2017년 봄의 한가운데에 서서
박세환
– 차례 –
제1장 커널형 이어폰
ㆍONKYO E900M
ㆍ1MORE E1010
제2장 오픈형 이어폰
ㆍ1MORE E1008
ㆍVE MONK PLUS Mic-U
제3장 블루투스 이어폰
ㆍBeats X
ㆍJabra Elite Sport
제4장 헤드폰
ㆍM&D MH40
ㆍONKYO A800
제5장 블루투스 스피커
ㆍUE Boom 2
ㆍXiaomi Mi Bluetooth Speaker Gold
제6장 기억에 남은 음악꾸러기
ㆍCork Speaker
ㆍLG TONE+ Active
제7장 마치며
ㆍ본 시리즈에 실린 음악들
To be continued…
「같이 들을래?」 시리즈
① 응답하라 8090
② 커널형 이어폰
③ 오픈형 이어폰
④ 블루투스 이어폰
⑤ 헤드폰
⑥ 블루투스 스피커
⑦ 기억에 남은 음악꾸러기
⑧ 마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