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 얘기입니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의 에피소드인데요. 당시 직원들 사이에서 다이어리의 대세는 단연 몰스킨(Moleskine)이었습니다. 특히 제 사수였던 분은 두툼한 몰스킨 다이어리를 매년 업데이트해서 사용할 만큼 몰스킨 마니아였죠. 저 역시 몰스킨의 까이에(Cahier)라는 리필형 다이어리를 애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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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시간이 되면 테이블 위에는 직원 저마다 개성이 살아있는 몰스킨의 향연이 펼쳐졌습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그때는 몰랐습니다. 단순 몰스킨st로 치부했던 그 다이어리가 트래블러스 노트(TRAVELER’S notebook)란걸 말이죠.

 

만만히 볼 수 없는 트래블러스 노트

몰스킨 까이에를 사용하던 제가 트래블러스 노트를 쉽게 지나칠 수 있던 이유는 두 다이어리가 언뜻 비슷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죽 커버부터 고무밴드로 노트를 고정하는 방식 등이 그렇죠. 트래블러스 노트가 조금 길쭉한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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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지는 어떨까요? 여행자의 노트라는 이름에 걸맞게 왠지 대강 휘갈기며 써도 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서 고생하는 여행을 무엇보다 품위 있게 기록할 수 있죠. 비결은 바로 종이. 종이의 질감만 놓고 보면 몰스킨보다는 한 수위가 아닐까 합니다. 필기감은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겠다는 당당함마저 느껴지죠.

 

그 속지의 이름은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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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러스 노트는 MD 용지로 된 속지를 사용합니다. MD 용지가 뭔지 살펴보기 전에… 디자인필(DESIGNPHIL)이라는 일본 회사가 있습니다. 디자인필은 잘 몰라도 여기서 만드는 디자인 문구 브랜드는 들어봤을 겁니다. 바로 미도리(MIDORI). MD는 다름아닌 MIDORI Diary의 약자입니다.

 

미도리의 중심에서 MD를 외치다

트래블러스 노트는 미도리의 대표적인 제품입니다. 이외에도 미도리에서 만드는 종이 자체에 매력을 최대한 살린 MD 노트가 있죠. 한때 만만하게 봤던 트래블러스 노트는 이제는 수많은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는 다이어리의 스테디셀러가 됐습니다. 아무래도 구성의 자유도가 높아 나만의 맞춤형 다이어리를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MD 용지라는 질 좋은 종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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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셔너리 분야의 마니아라면 종이 질감이 우선이겠죠. MD 용지가 세계 NO.1의 최고급 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마니아가 아니라면 지금까지 경험했던 그 어떤 종이보다 느낌이 다를 겁니다. 특히 만년필과 궁합이 뛰어난 편인데요. 펜촉 끝이 미끄러지는 느낌은 흡사 만년필을 위해 만들어진 종이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입니다. 잉크가 번지거나 마르는 정도도 적절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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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로 쓰는 경우 잉크가 어느 정도 뒤로 배어나는 현상은 어쩔 수 없지만 MD 용지는 그럭저럭 만족할만한 수준을 보여줍니다. 물론 민감한 차이지만요.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면 사치스럽게 한쪽 면만 써야 할지도 모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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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굳이 만년필이 아니더라도 좋습니다. 어떤 필기구라도 잘 받아들이거든요. 다른 종이보다 왠지 도톰하게 느껴지는 편인데요. 종이 자체의 감촉이 탁월해서인지 손끝으로 쓰다듬는 느낌도 남다릅니다. 이상스럽겠지만 아무 것도 쓰여지지 않은 텅 빈 종이를 보고 만지기만 해도 만족스럽죠.

 

60년 전에도 이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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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 용지는 꽤나 오래된 종이입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되어 나름 긴 역사를 지니고 있죠. 물론 공장에서 기계로 생산되겠지만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이 녹아 있을 것만 같습니다. 몰스킨 다이어리의 경우 종이 질이 떨어졌다는 얘기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물론 사용자마다 다른 섬세한 느낌 차이겠지만 MD 용지는 아직까지 이런 얘기를 들어 본적이 없네요. 60년 동안 종이 질이 유지되고 있는 걸까요?

 

MD 노트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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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 용지를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트래블러스 노트보다 MD 노트를 추천합니다. 일본 제품에서 볼 수 있는 심플함의 극치를 달리는 제품인데요. 첫인상부터 너무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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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라고 부를 수 없는 표지. 그대로 노출된 보강테이프. 뭔가 부족해 보이지만 이마저도 개성 넘쳐 보입니다. 종이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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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하게 활짝 펴지는 점은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16페이지 단위로 실제본으로 제작되었는데요. 편리하면서도 튼튼하기까지 합니다. 가운데 부분이 뭉툭하게 접혀 있으면 안정적인 필기가 불가능하죠. MD 노트는 제작 방식부터 필기감을 배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이 자체에 자신감이 없다면 무의미하겠죠.

 

순면 펄프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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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 노트는 MD 용지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제품입니다. 살짝 누리끼리한 크림색이죠. 좀 더 새하얀 색을 원한다면 MD 노트 COTTON이 좋습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순면 펄프 20%를 배합시켜 만들어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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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료가 달라서인지 종이도 조금 다릅니다. MD 노트는 미끄러지는 듯한 필기감이었다면 MD 노트 COTTON은 좀 더 사각거리는 맛이 나죠. 기계식 키보드로 따졌을 때 갈축과 적축의 차이 정도? 만년필을 사용한다면 확실히 펜 끝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약간은 거칠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요. 다행히 번짐 현상이나 건조 시간은 안심해도 됩니다. 뒤에 비치는 건 일반 MD 노트보다 좀 더 심한 듯 합니다.

 

미도리 콜라보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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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 용지를 만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데네르(Dainel)를 꼽을 수 있습니다. 미도리 제품 중 마이스터스 노트(THE MEISTER’S Note)라는 라인업이 있는데요. 속지는 MD 용지를 사용하고, 커버만 전세계 각국의 특색 있는 소재를 사용한 제품입니다. 그 첫 번째가 프랑스산 소재를 사용한 데네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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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네르란 프랑스어로 스웨이드입니다. 보들보들한 느낌의 그 스웨이드 맞습니다. 물론 실제 가죽이 아니라는 점이 함정이죠. 섬유 등을 접착제로 고정하는 플록 가공(Flocking), 흔히 후로킹이라 불리는 원단을 사용했는데요. 보기에는 거의 스웨이드 100%입니다. 하지만 만져보면 살짝 낯설죠. 방금 미용을 마친 애완견의 짧은 털을 쓰다듬는 느낌? 커버의 두께도 얇은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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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얇은 노트치곤 이 정도로 세련된 제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100 페이지에 미치지 못하는 얇은 두께지만 적당한 크기로 인한 뛰어난 휴대성과 MD 용지만의 탁월한 필기감, 레더 페이퍼라 불리는 신선한 커버의 조합은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저 역시 여태껏 사용하던 몰스킨 까이에대신 미도리 데네르를 애용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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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줄 요약
– 미도리 제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MD란 단순하게도 MIDORI Diary의 약자다.
– 트래블러스 노트에서 종이 질은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다.
– MD 용지와 만년필과 궁합은 좋은 편이다.
– MD 노트는 부족해 보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개성 넘친다.
– 미도리 데네르는 막 들고 다녀도 세련되어 보인다.
고르다 사다 쓰다 사이에 존재하는 쉼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