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PO라는 단어가 있다.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을 한데 엮은 말이다. TPO 에티켓이라든지 TPO 코디라든지. 아마 한 번쯤은 들어봤을 거다. 주로 시간・장소・상황에 걸맞은 행동이나 옷차림을 조언하는 데 쓰인다. 빔프로젝터 리뷰 보러 왔는데, 웬 TPO 타령이냐 생각하진 마시길. 다 이유가 있으니까.

나는 영상 장비 고르는 데도 이 TPO가 중요하다고 본다. 영화 한 편 보는 것에도 TPO가 있고, 여기에 어울리는 장비를 곁들여야 보는 맛과 무드가 산다고 여긴다. 그래서 소규모 모임을 하거나 호감 있는 친구를 집으로 초대할 때, 그리고 학수고대하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가 마침내 공개됐을 때. 이럴 땐 태블릿이나 스마트폰 따위는 꺼내지 않는다. 조용히 TV부터 끄고, 피코 프로젝터를 집어든다.
기쁘게 반겨주는 조그마한 브라운

젤리빔 JB-100은 내가 주로 쓰는 피코 프로젝터, 그러니까 초소형 스마트 미니빔이다.
라인프렌즈 옷을 입고 출시됐는데 생김이 아주 깜찍하다. 외관을 보면 브라운과 샐리가 전면에서 반겨준다. 상・하단과 손잡이는 브라운의 색으로 채색됐다. 여기저기 등장하는 탓에 식증 날 법도 한 라인프렌즈인데, 여전히 사랑스러운 디자인이다. 굳이 이 녀석을 고른 이유도 라인프렌즈 에디션이기 때문. 손잡이를 렌즈 덮개로 활용하면 프로젝터로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인데, 귀여움이 통통 튄다.
크기는 45×45×46㎜다. 무게는 고작 110g. 손바닥에 쏘옥 들어오며 얇은 파우치에도 들어간다. 그럴 필요는 없지만, 조금 무리하면 바지 주머니에도 넣을 수 있다.
작고 맹랑한 피코 프로젝터

몸집은 조그만한 게 하는 짓은 맹랑하다. 보통 ‘스마트’가 붙었다는 건 스마트폰처럼 OS를 품었다는 의미다. 젤리빔에는 안드로이드 5.1 기반의 커스텀 OS가 들어갔다. 라인프렌즈로 디자인된 깜찍 발랄한 운영체제다. 자체 OS를 가진 덕분에 물리적 연결 없이 콘텐츠를 재생할 수 있다.

너무나 작은 크기이기에 당연히 추가 연결 단자 같은 건 없다. 마이크로 SD 카드 슬롯만 하나 존재하며, 모든 콘텐츠는 자체 OS를 통해 출력한다. 스트리밍뿐만 아니라 저장된 영상을 재생하기도 한다. 약 2.3GB의 저장 공간을 갖고 있으며, 부족한 용량은 외장 메모리로 보완할 수 있다.
온라인 스트리밍을 이용하려면 와이파이를 연결해야 한다. 5㎓ 대역이 아닌 2.4㎓ 대역 802.11 b/g/n만 지원한다. 전송 속도가 낮은 대역 맞다. 하지만 고해상도 영상을 지원하지 않기에 스트리밍에 큰 지장은 없다. 젤리빔은 VGA(640×480) 급 해상도를 보여준다. 명암비는 800:1 수준이다. LED는 오슬람사 제품이 들어갔으며 수명은 2만 시간 정도로 알려졌다. 스피커 또한 품고 있다. 0.7W 출력으로 뽑아내는데, 이 작은 몸집에서 무려 스테레오 사운드를 낸다.
혼자서도 잘하는 젤리빔이지만, 이것저것 연결하면 더 다채롭게 쓸 수 있다. 블루투스 4.0을 지원해 외부 스피커 연결이 가능하다. 부족한 사운드를 생생하게 채울 수 있다. 미러링 기능도 있다. 미라캐스트와 에어플레이를 지원한다.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 윈도 디바이스를 미러링해 스마트폰 속 사진과 영상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버튼 하나로 영화관처럼

젤리빔이 있다면 TV를 수시로 끄게 된다. 육중한 프로젝터와 달리 한 번 사용하기 위해 준비할 게 없다. 서랍에서 꺼내 전원 버튼만 누르면 된다. 전용 리모컨 덕분에 TV처럼 조작하며 바로 영상을 재생할 수 있다. TV만큼의 화질과 사운드를 보여주진 않지만, 프로젝터 특유의 영화관 감성은 선사한다. 그래서일까. 거실에서 TV를 보기보단 내 방으로 들어와 젤리빔을 켜게 된다.


화질은 방안에서 소소하게 즐기는 데 무리 없는 수준이다. 4K는커녕 HD(720p) 급에도 못 미치는 VGA급 해상도로 뭘 보냐고? 당연히 뭉개지는 영역은 존재한다. 선예도가 떨어지는 탓에 텍스트 표현력도 달리는 편이다.
색감 표현과 밝기 역시 뛰어나진 않다. 밝기는 80루멘이다. 루멘은 스크린의 밝기가 아니라 광원, 그러니까 렌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세기를 말한다. 스크린에 닿은 빛과 그 평균값을 측정한 ‘안시루멘’과 다른 개념이다. 한마디로 실제 화면(스크린) 밝기는 80루멘보다 약하다는 이야기다. 불을 완전히 끄고 보면 문제 삼을 게 없으나 주광 환경이나 밝은 실내에서 보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스크린은 2m 거리에서 61인치까지 뽑아낼 수 있다. 더 넓게 확장할 수 있지만, 권장 거리는 2m 이내다. 2인 이상이 본다면 이 정도가 딱이다. 화면이 커질수록 밝기가 낮아져, 가시성이 떨어지는 탓이다. 혼자 본다면 1m 거리에서 30인치 정도로 보는 게 만족스럽다.
여기까지 보면 전체적으로 모자란 제품으로 여길 수 있으나 결코 아니다. 이건 제품의 문제가 아니라 피코 프로젝터의 한계일 뿐. 이런 류의 프로젝터는 간편성과 휴대성, 가성비에 초점 맞춰졌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영상을 구석구석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영상미 예찬론자가 아닌 이상 1~3인이 가볍게 보는 데는 쓸 만한 제품이다.
어떤 콘텐츠도 스마트하게

젤리빔은 능력도 좋다. 인터넷, 유튜브, 넷플릭스, 스마트폰 미러링, 저장된 콘텐츠를 리모컨 조작으로 손쉽게 즐길 수 있다. 동영상 플레이어가 설치된 덕분에 PC 사용하듯 내려받은 영상을 저장해 놓고 간편하게 재생할 수 있다.


물론 넷플릭스 보는 데 더 어울리긴 한다. 리모컨을 마우스, 스크롤 모드로 변환해 가며 콘텐츠를 검색하고 재생해야 하는데, 이게 쾌적한 경험은 아니거든. 마우스 커서가 있으나 거의 5㎜씩 움직이는 수준이다. 인터넷은 스마트폰으로 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OS에 기본 설치된 넷플릭스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미러링해 사진이나 영상을 보는 게 한결 편하다. 아마 젤리빔을 구매한다면 이 기능을 주로 활용하게 될 거다.

외장메모리나 스마트폰에 영화를 저장해 놓는 편이 아니라면(스트리밍만 즐기는 사람이라면) 영화 한 편 보는 게 번거롭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영화를 검색해 찾고, 내려받고, 저장하는 거 자체가 귀찮은 일이니까.
휴대성으로 올킬


“영화 보자고? 내가 프로젝터 들고 갈게.”
초소형 스마트 미니빔이 있을 때만 꺼낼 수 있는 말이다. 젤리빔의 가치는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것에서 극대화한다.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면 외투 주머니에 넣으면 그만이다. 크기가 작으면서 소음 또한 적다. 콘텐츠를 즐길 때 전혀 방해되지 않는다. 자동 키스톤 기능까지 갖춰 원하는 곳에 올려놓고 보기 좋다. 알아서 수평이 맞아서 화면 조정하는 불편함이 최소화한다. 삼각대에 올려놓고 쓰면 사용성이 더욱 좋아진다. 물론 이건 별도 구매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집들이 가거나 캠핑 가거나 외부에서 좋아하는 영상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집 안에서도 여기저기 들고 다니기 탁월하다. 거실이든 안방이든 작은 방이든 흰색 벽만 있다면 내려놓는 그곳이 바로 영화관으로 탈바꿈한다.
이것은 ‘간이’ 영화관

젤리빔은 내방을 간이 영화관으로 만들어주는 귀엽고 맹랑한 제품이다. 굳이 ‘간이’라는 단어를 꺼낸 건 영상을 ‘본격적’으로 즐기려는 목적에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 또는 두셋이 ‘가볍게’ 즐길 해상도와 사운드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HD 급 이상의 선예도를 기대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사운드는 평이하다. 작은 몸집에서 이 정도 소리를 낸다는 건 놀랍지만, 전체적으로 가볍게 울려 퍼지는 정도다.

앱 설치에도 한계가 있다. 앱 스토어가 없는 탓이다. 앱을 설치하려면 윈도 PC와 연결한 다음 APK 파일(안드로이드 앱 설치 파일)을 넣어줘야 한다. APK Pure 앱을 설치하면 젤리빔 OS 내에서 APK 파일을 직접 내려받아 설치할 순 있다. 하지만 지원 앱이 다양한 것 같지는 않다. 참고로 왓챠플레이 앱은 설치만 되고, 구동되지는 않더라. 넷플릭스 전용으로만 쓰게 되는 점은 다소 아쉽다.
미러링 기능으로 스마트폰 속 왓챠플레이 앱을 재생하면 되지 않냐고? 미러링 플레이 시 딜레이가 살짝 있을 뿐 아니라, 이 경우 저작권 보호 기술이 걸린 탓에 재생이 불가능하다. 제3의 기기에서 왓챠 콘텐츠를 끌어다가 출력하는 걸 막아놓은 듯하다. 넷플릭스도 마찬가지다.
사용 시간은 가장 안타까운 부분. 무선 사용 시 1시간 내외로 버틴다. 2시간 이상의 영화를 보려면 전원선을 꽂거나 보조배터리를 필수로 물려줘야 한다.

이런 소소한 아쉬움에도 굳이 스마트 미니빔을 고집하는 이유는 아마도 ‘경험’ 때문이겠다. 똑같은 영화, 똑같은 드라마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느끼는 경험은 천지 차이니까. 혼자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 보는 게 지겨울 때,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TV 보는 게 밋밋할 때가 있지 않나. 이럴 때 젤리빔 JB-100은 우리를 영화관 같은 환경으로 초대해 준다.
누군가는 젤리빔을 들여놓은 뒤로 ‘저녁 있는 삶’의 질이 달라졌다는 극찬까지 보내더라. 화질은 차치하고, 보는 맛이 다른데 무슨 말이 필요하나.
그리고 또 하나. 널 너무나 사랑해서 난 TV를 껐네.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이 녀석은 우리의 공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기도 하거든.
총점 |
8.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