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리어답터는 ‘You are what you buy’라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일상에서 우리가 제품을 선택하는 데 보다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내고자 한다.
금중혁 컨트리뷰터는 새로운 세상과 사람을 만나고자 25개국을 다녔지만, 결국 방구석에서 여전히 게임을 즐기는 중이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 얻게 되는 교훈도 좋지만 그는 게임을 통해 인생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다양한 기술과 문화의 총아인 게임 산업은 이제 단순히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갈취하는 분야가 아니라 최첨단 산업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지만 우리 (중 일부)는 여전히 게임을 불경(?)한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금중혁의 렛츠플레이]에서 다루는 게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통해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2014년 ‘포켓몬 월드 챔피언십’에 출전한 한국 대표 박세준 선수는 ‘파치리스’라는 평균을 밑도는 능력치의 포켓몬과 함께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강한 포켓몬, 약한 포켓몬, 그런 건 사람이 멋대로 정하는 것”이라는 게임 속 명대사를 떠올리게 한 이 일화는 세상에 가치 없는 포켓몬은 없다는 것을 다시금 알려줬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탄생부터 무대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 단 한 마리의 포켓몬도 어설픈 노력으로는 강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줬다.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피카츄를 키운다고 가정해 보자. 최강의 피카츄를 만들기 위해선 특성, 성별, 개체 값, 성격, 노력치, 종족 값, 아이템 등 대략 7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우선 조상이 될 야생 피카츄를 잡아야 한다. 포켓몬은 종마다 특별한 능력을 한두 개씩 지니는데 이를 특성이라 한다. 일반적 특성을 원한다면 상관이 없지만 숨은 특성을 원한다면 난입 배틀을 해야 한다. 미끼를 이용해 끊임없이 피카츄를 불러들이고 쓰러뜨려 나가는 방식이다. 수십 마리 정도 상대하다 보면 숨은 특성을 가진 피카츄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한눈에 봐서는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 모르기 때문에 일일이 특수 기술이나 아이템을 이용해 포획하기 전까지 확인해야 한다. 실수로 일반 특성 피카츄를 잡았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희귀 포켓몬 중에는 자폭, 탈주 등을 시도하는 녀석들도 있기에 이 과정부터 만만치 않다.

어찌저찌 조상을 준비했다면 자손을 만들 차례다. ‘데이케어 센터’로 데려가 한 쌍을 맡긴다. 포켓몬에 따라 무성이거나 한 가지 성(性)만 있는 등 곤란한 케이스가 있는데 그럴 땐 변신 포켓몬 ‘메타몽’과 짝을 지어주면 해결(?)된다. 알은 건물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면 생긴다. 이제 몇 분 정도 들고 뛰어다니면 알이 부화한다.
모든 포켓몬은 개체별로 다른 선천적 능력치를 부여받으며 이를 개체 값이라 한다. 개체 값이 큰 부모에게서 우수한 자녀가 나올 확률이 높기에 자녀의 능력치가 부모보다 높다면 바꿔치기 해가며 조금씩 능력치가 높은 자손을 얻는다. 혹여 특수한 유전 기술이라도 가르치고 싶다면 두세 단계의 이종 교배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앞서 서술한 메타몽 중 능력치가 높은 육갑메타몽(6개 능력치가 전부 최고치)을 가지고 있다면 상당히 편하다. 물론 육갑메타몽을 얻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긴 하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피카츄를 대략 50마리가량 갈아치우다 보면 그럭저럭 쓸만한 개체 값의 포켓몬을 얻을 수 있다.
성별과 성격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별에 따라 다른 포켓몬으로 진화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랜덤으로 주어지는 성격에 따라 능력치도 달라지기에 원하는 성격을 맞추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성격과 능력 중 일부를 확정적으로 자녀에게 유전해 주는 아이템을 따로 준비한다면 조금 시간을 단축할 순 있다.
고생 끝에 우수한 종자를 얻었다면 이제 노력치를 부여하면 된다. 후천적인 교육이다. 키우고 싶은 능력에 따라 다른 포켓몬과 배틀을 시키면 조금씩 노력치가 쌓인다. 마찬가지로 배틀 없이 노력치를 얻게 해주는 나무 열매가 있지만, 이를 키우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우생학, 근친상간, 도박, 대리모 등 비도덕의 끝을 달리는 일련의 과정을 전부 거치면 우수한 유전자에 우수한 교육까지 받은 최강의 피카츄가 탄생한다. 막노동과 뽑기 운으로 점철된 지난한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이 아니다. 아직 종족 값이라는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종 자체의 능력을 종족 값이라 한다. 개체 값과 노력치는 어디까지나 종족 값의 오차 범위 내에서 따지는 비교적 미미한 수치다. 피카츄의 종족 값은 320이며 파치리스는 405의 종족 값을 가진다. 그럭저럭 쓸 만한 일반 포켓몬이라는 평을 듣는 스타팅 포켓몬의 최종 진화형, 이들의 종족 값이 530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둘이 얼마나 약한지 짐작할 수 있다. 어찌 됐든 봐야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종족 값까지 살펴야 한다니. 역시 강한 포켓몬 얻기란 이렇게 힘든 일이다.
가랏! 앱솔!
때문에 유저 대부분은 매우 보편화한, 그럭저럭 쓸 만한 포켓몬 세트를 주로 선택한다. 기껏해야 천 마리를 넘지 않는 포켓몬 중에 종족 값이 큰 녀석들은 한정되어 있으며, 밸런스 패치가 적극적으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비단 포켓몬뿐만 아니다. 캐릭터가 많은 대전 게임은 대체로 객관적으로 강력한 일명 ‘사기캐’의 존재에 휘둘리게 된다.
다만 <포켓몬스터>는 여타 게임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아무리 약한 포켓몬이라도 한 마리 한 마리 트레이너가 애정과 노력을 쏟아붓는다면 그 정성에 반드시 보답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박세준 선수와 파치리스가 우리에게 일깨워준 사실이기도 하다.

보편화한 포켓몬, 사기캐가 판을 치는 이유는 단순히 다른 캐릭터와 비교해 강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우리가 다른 캐릭터에게 애정을 갖지 않았고, 잠재력을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파치리스와 같은 일반 포켓몬이 사기캐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도 박세준 선수를 보고 트레이너 혼에 불이 붙었던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앱솔’이라는 포켓몬을 가장 좋아하는데 아이템, 특성, 기술을 조합해 치명타를 100% 확률로 적중시키는 앱솔을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닥 치는 내구도를 끝내 극복할 수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강한 포켓몬을 사용해 이길 때보다 더 즐거웠다. 지더라도 끊임없이 터지는 내 앱솔의 치명타에 당황하는 상대방을 떠올리는 순간이 더 짜릿했다. 사기캐, 그거면 된 거 아닐까?
피카츄도, 앱솔도 좋다. 필자는 트레이너의 정성에 따라 어떤 포켓몬도 사기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자신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그 한 마리가 바로 최강의 사기캐로 성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젠가는 최하의 종족 값을 가진 약어리와 함께 왕좌에 오르는 챔피언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그날까지는 포켓몬을 즐길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올해 연말, 포켓몬스터 8세대 게임인 <포켓몬스터 소드>, <포켓몬스터 실드> 버전이 출시된다. 새 게임에서도 앱솔을 ‘나만의 사기캐’로 키워볼 계획이다. 이번에도 앱솔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