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리어답터는 ‘You are what you buy’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일상에서 우리가 제품을 선택하는 데 보다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내고자 한다. 

영화야말로 사람들에게 자주, 그리고 많이 소비되는 문화상품인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취향을 많이 타는 제품(Product)이기도 하다. 그래서 준비했다. <유선생의 방과후 영화: 이미 꼰대가 되어버린 어느 교사의 취미 생활>은 국어교사인 동시에 시네필(Cinephile)이기도 한 유호정 컨트리뷰터만의 시선으로 영화 리뷰를 풀어내고자 한다. 특성상 스포일러가 조금씩 묻어날 수 있다. 여기서 더 내려갈 것인가 말 것인가는 이제부터 당신의 선택일 뿐. 

– EDITOR IN CHIEF 신영웅

휴가철이다. 적금을 깨고 ‘딸라’ 빚(?)을 내서라도 떠나야 한다. 인생은 한 번뿐. 노후 걱정은 노후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떠난다. 국내도 좋고 해외도 좋다. 우선 떠난 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인생샷을 올린다. 좋아요 개수로 과도한 지출에 대한 고민을 멈추고 자신을 긍정하며 차가운 맥주 한잔에 브레인을 식혀야 한다. 그것이 휴가다.

그럼 혼자 가야 할까, 여럿이 가야 할까? 혼자 가면 자유를 마음껏 즐길 수 있겠지만, 우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마음껏 누릴 자유는 약 5분 정도로 짧다는 것을. 그 뒤로 길고 긴 외로움과 무료함의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그럼 여럿이 가야 할까? 함께 있기만 해도 손바닥으로 서로의 등짝을 치면서 물개 박수 하게 되는 친구들이 있다. 여행 기간 내내 미치도록 웃고 함께 수다를 떨 친구들. 그러나 우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여행은 만들어지기 정말로 쉽지 않다는 것을. 중간에 말다툼이라도 하는 날엔 일정은 다 틀어지고, 돈은 돈대로 쓰면서 기분은 기분대로 잡치면서, 어서 빨리 집에 가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먼 이국의 쌀국수를 뒤적이게 된다는 것을.

그럼 어떻게 해? 당신이 만약 “휴가라고 떠나 봐야 돈만 쓰고 남는 것 하나 없다”며 집에서 영화나 보자고 넷플릭스, 유플릭스의 아이디를 공유하더니만 급기야 콜라와 메로나, 맛동산에 심지어 버터링쿠키마저 잔뜩 사가지고 온 천만 금의 황금도 부럽지 않은 친구를 두었다면 해결될 문제다. 다들 그런 친구 한 명씩은 있지 않나. (이 양반이 아싸의 참된 외로움을 모른다고?)

그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영화 둘이서 봐야 좋을 것 하나 없다. 자고로 휴가란 혼자 영화 보는 시간이다. 적금도 살려 두고, 딸라 빚도 필요 없다.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마트에 가서 커피 맛 우유하고 취향에 맞춰 고소미하고 요새 다이어트 하고 있다면 다이제가 그렇게 살이 많이 찐다고 하니 그거 몇 개 사 오면 휴가 준비는 끝난다. 아이스크림은? 안 사도 된다. 여기 유선생이 아이스크림 맛 영화를 준비했다(내가 쓰면서도 진짜 느끼하긴 하다).

민트 초코 : 해변의 폴린느

해변의 폴린느(Pauline A la plage, 1983)

민트 초코는 호불호가 나뉜다. 좋아하는 사람에겐 청량한 초콜릿이고, 싫어하는 사람에겐 자고 일어나서 잘못 삼킨 치약이다. 취향에는 잘못이 없다. 다만, 취향을 지니게 된 과정과 취향을 지니고 난 후의 ‘태도’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취향을 존중받고 싶어 하지 않나. 민트 초코에 대한 취향 정도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 대상이 민트 초코가 아닌 사람이라면? 여기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영화로 이미 현대의 고전에 되어 버린 영화가 있으니 에릭 로메르 감독의 <해변의 폴린느(Pauline A la plage, 1983)>다.

일 년 내내 보고, 명절 때 또 보고 별 이변이 없는 한 내년에도 다시 보게 될 마블과 디씨로부터 벗어나 조금은 지적인 경험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두말할 필요 없이 추천한다. 프랑스를 사랑한 나머지 파리 여행을 다녀오긴 했는데, 에펠탑하고 지하철역밖에 기억나는 것이 없어서 다소 아쉬운 사람이라면 더욱더 무조건 봐야 하는 영화로 추천하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랑과 관계에 경박하기 그지없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우리는 대개 사랑과 관계에 진지하지 않나. 하지만 짐작건대 사랑과 관계에 경박한 그들은 이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며, 이미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없는 우리만 이 영화를 붙잡고 앉아 울게 될지 모른다. 아니다. 이 영화는 눈물을 흘리게 되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 이야기 덕분에 다소 울적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아름다운 남프랑스의 해변과 지금 보아도 산뜻한 생제임스 빈티지 티셔츠가 마음을 달래줄지도 모른다. 어서 프랑스 해변으로 고고싱.

다크 초콜릿 : 다가오는 것들

다가오는 것들(L’avenir, 2016)

영화 도입부에 바닷가로 휴가를 떠나면서 동시에 다크초콜릿스럽게 무거운 영화를 찾다가 난데없이 <돌로레스 클레이븐(Dolores Claiborne, 1994)>을 떠올렸다. 그런데 <돌로레스 클레이븐>은 휴가를 즐기기 위한 영화로 보기엔 다소 무거운 감이 있어 나중에 다시 다뤄보기로 한다. 그렇다면 조금 덜 어두우면서도 가볍지 않고, 묵직하게 옆구리를 강타할 영화이면서, 동시에 도입부에 바다로 휴가를 떠나는 영화로 뭐가 있을까. 이자벨 위페르의 <다가오는 것들(L’avenir, 2016)>이 좋겠다. 이 영화, 누구에게 추천하면 좋을까.

이런 사람이 있다면 딱이다. 최근 남편이 식사하거나 차를 마시던 도중 이야기 잘하다가 갑작스럽게 “나 바람피우고 있다”고 고백해 온 전문직 55세 이상의 여성이면 딱 좋다. 백 명쯤 될까. 바람피우는 거 고백까지는 어떻게 수를 세보겠는데, ‘일상 이야기를 잘하다가 뜬금없이 바람을 고백하는 사람’은… 이거 쉽지 않다. 다시 추천 범위를 넓혀 보자. 누구로?

최근 그러한 부모 때문에 심란한 20대 대학생이거나(대학원생도 포함해야겠다.), 혹은 그러한 20대를 지나쳐 와 “이제는 어지간한 슬픔 따윈 나를 힘들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자신이 무척 강한 멘탈을 지닌 것으로 착각하는 30대에게 추천할 수도 있겠다.

다가오는 것들(L’avenir, 2016)

꼰대력 레벨 업! ‘오 애송이여. 생의 지뢰밭은 나이와 멘탈의 힘 따위에 구분을 두지 않는다네.’ 영화는 다크 초콜릿처럼 무겁고 씁쓸하다. 하지만 진지하고 지적이다. 삶과 죽음과 같은 실존적 질문으로부터 제도와 관습 아래에서의 인간 같은 철학적 질문이 얽혀 있다. 맨날 보는 마블과 디씨로부터 벗어나 진지한 영화로 자신의 뇌를 구겨보고 싶은 관객들에게 강추.

쿠키 앤 크림 : 비거 스플래시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회가 성황리에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 <Bigger splash(1967)>는 붓 터치가 사라진 기계적인 색감과 기하학적인 구도의 배경에 난데없이 누군가 수영장 속으로 ‘첨벙’ 하고 떨어진 후를 포착한 작품이다. 특유의 경쾌함과 그 속에 숨은 우울과 불안의 영감 속으로 우리를 빠트리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5분 정도 숨을 참고 있다가 다시 물 밖으로 나와 ‘파!’ 하고 숨을 내뱉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받는 것 같다.

이 작품은 호크니가 캘리포니아에 살던 1960년대에 제작되었다. 미국의 60년대를 껴안고 이 그림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그런데 미국의 60년대란 사실 너무 광범위하다. 조금 좁혀 집집이 은행에 빚을 내고 수영장을 만들어서 즐겼던 캘리포니아의 60년대로 가보면 이 작품에 드리워진 그늘과 우울의 정체에 한 발자국 다가서게 된다.

이 그림엔 표정 없는 표정이 드러나 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남자일까, 여자일까? 그는 마음껏 웃고 있을까? 아니면 실제로 딸라 빚을 지고 사는 사람으로서의 여유와 불안으로 복잡하게 일그러진 얼굴일까? 사고일 수도 있다. 살인이나 폭행 같은. 비거 스플래시라는 그림의 제목이 우리를 물속으로 빠트린다. 그 영감이 하도 심난한 나머지 2019년에 저 작품은 프린트되어 20만원 짜리 액자로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우리는 우울을 사랑해?

비거 스플래시(Bigger splash, 2016)

<비거 스플래시(Bigger splash, 2016)>는 그림의 배경을 캘리포니아에서 이탈리아 작은 섬 판텔레리아로 바꾸어 놓은 영화다. 영화 내용은 둘째 치고 판텔레리아라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이 작은 섬에 끌렸다. <트립 투 스페인(The Trip to Spain, 2017)>이나 <트립 투 이탈리아(The Trip to Italy, 2014)> 같은 트립 투 시리즈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펼쳐지는 풍광에 넋을 잃었다고나 할까. 비비 꼬이고 꼬여 점점 파국을 향해 내딛는 영화의 스토리도 물론 훌륭하지만, 시트로엥 메하리를 타고 돌아다니는 인물들의 모습이 정말로 영화처럼 그려진다.

비거 스플래시(Bigger splash, 2016)

판텔레리아라. 여긴 정말 돈 들여 가볼 만한 곳 같다. 여기 보니까 아직 중국 사람들도, 일본 사람들도 많이 다녀간 곳은 아닌 듯하다. 다음 여행을 이탈리아의 판텔레리아로 계획한 사람이 있다면! 이 욕망에 철철 넘쳐 헛발질하는 사람들의 유쾌한 살인 소동극 <비거 스플래시>를 강력 추천한다. 나도 틸다 스윈튼이나 랄프 파인즈처럼 차려입고 해지는 판텔레리아 섬을 걸어보고 싶다. 비비 꼬인 욕망이야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휴가철을 맞아 휴가처럼 즐기는 영화 세 편을 골라봤다. 세 편을 골라 이 쉬운 글을 이틀에 걸쳐 작성했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세상은 계속 우울해진다. 싸움을 멈추고 딱 두 시간만 세상 모든 사람이 각자 준비한 간식을 먹으며 영화를 보는 상상을 해본다. 아베도, 시진핑도, 트럼프도, 너도, 나도.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누군가 멋쩍은 얼굴로 기지개를 펴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영화 잘 봤으니
우리 식사나 같이하면서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제가 사겠습니다.”

과연? 헛된 꿈이로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해지는 판텔레리아에서 촛불을 켜고 와인을 마시고 싶다.

자고로 휴가란 혼자 영화 보는 시간이다.
영화를 많이 봅니다. 영화보다는 극장을 좋아합니다. 영화는 그저 그런 영화가 많은데 어두운 극장은 어두워서 늘 새롭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