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리어답터는 ‘You are what you buy’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일상에서 우리가 제품을 선택하는 데 보다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내고자 한다. 

영화야말로 사람들에게 자주, 그리고 많이 소비되는 문화상품인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취향을 많이 타는 제품(Product)이기도 하다. 그래서 준비했다. <유선생의 방과후 영화: 이미 꼰대가 되어버린 어느 교사의 취미 생활>은 국어교사인 동시에 시네필(Cinephile)이기도 한 유호정 컨트리뷰터만의 시선으로 영화 리뷰를 풀어내고자 한다. 특성상 스포일러가 조금씩 묻어날 수 있다. 여기서 더 내려갈 것인가 말 것인가는 이제부터 당신의 선택일 뿐.

– EDITOR IN CHIEF 신영웅

이제 좋았던 6월은 가고, 뜨겁고 긴 여름이 펼쳐진다. 여름은 몇 개의 풍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팔 셔츠를 입은 대머리 아저씨가 땀을 닦고, 원피스를 챙겨 입은 아가씨가 손선풍기로 얼굴에 바람을 쐬며 음악을 듣는다.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끌며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이 떠들고 있다. 개 두 마리가 자동차 그늘 밑에서 오후 내내 잠을 자고 있다. 할머니들은 부채질을 멈추고 졸기 시작했다. 수박 파는 아저씨 방송만 골목에 가득하다. 마을버스가 경적을 울린다. 오토바이가 멀리서 다가왔다가 다시 사라지는 소리를 낸다.

여름은 몇 대의 전철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여름을 이루는 전철이 지나간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아주 멀리 떠나는 기차라도 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면서 지나가고 있다. 전철이 곧 도착한다는 안내와 함께 전철 안내 알람이 공간에 울린다. 전철이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린다. 샤워할 때 쓰면 좋은 각질 제거용 돌과 때밀이 손수건을 미처 다 팔지 못한 아저씨가 내린다. 지금 오늘의 전철에 애인과 헤어진 사람이 두 명, 비정규직 일자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알아보는 사람 일흔두 명, 술 마시러 나가는 아저씨 일곱 명이 타고 있다. 다들 다시 타고 내린다. 여름의 사람들이 몇 대의 전철 위에 몸을 기대고 있다.

여기서(HERE), 리처드 맥과이어

리처드 맥과이어(Richard Mcguire)는 <여기서(HERE)> (미메시스, 2017) 라는 작품에서 시간과 공간을 오려 붙이는 독특한 작업을 시도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들을 알고 있다. 수십 년 전의 흑백 사진과 현재 컬러 사진에 찍힌 같은 공간을 하나의 사진으로 연결한 것. 시간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공간이 두 사진을 하나로 연결해 준다. 머리도 채 나지 않은 아기였던 사람이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되어있다. 리처드 맥과이어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간다. 그러니까 만약 수십 년이 아니라 일, 이백 년쯤 지나면 이 공간은 어떻게 될까. 아니 한 천 년 전에는 이 방을 차지하고 있는 이 공간은 어디였을까. 백 년, 이백 년, 시간이 흐를수록 사진은 더는 공통의 분모를 찾지 못하고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시간은 과거로 무한히 흘렀다가 다시 미래로 복귀한다. 어느 시대였든 우리로부터 멀 뿐이지 그 시대에도 사람들이 있고, 상황들이 있었고 인생이 있었다. 대사를 첨가한다. ‘여기’라는 공간에, 여러 세대의 대사들이 떠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다 보면 아늑히 먼 과거와 다만 우주의 한 공간을 스치며 ‘빠르게’ 회전하고 있는 우주의 작은 점 지구와 거기에 올라와 있는 우리들의 작은 방들이 떠오른다. 우리는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돌발사건이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히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수도 있다. 여름의 오후, 낮잠에서 깬 뒤 창밖의 빛들을 바라보는 어둡고 눅눅한 무의미의 쾌감이 아득하다. 여름은 때로 우주와도 연결되어 있다.

그새 노량진역에서 전철이 한 대 떠나갔다. 하나는 보훈병원으로 가는 것이고, 하나는 인천 방면으로, 다른 한 대는 병점 방면으로 떠나고 다른 하나는 춘천으로 떠나는 것이다. 행선지가 저마다 다른 전철들이 쉼 없이 오고 가고 있다. 그 전철마다 사람이 내리고 타고 있다. 여름을 구성하는 시간들이 전철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동경이야기(1953), 오즈 야스지로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이야기(tokyo story)>(1953)에는 이야기가 없다. 물론 이야기야 있다. 시골에 있는 늙은 부부가 동경에 살고 있는 자식들을 보기 위해 상경한 것이다. 그다음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가 흐른다. 이런 걸 이야기라 할 수 있을까. 이 영화를 보는 가장 어리석은 방법은 이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따지며 극적인 반전과 이야기의 구성을 따져 묻는 것이다. 이 영화엔 그런 것이 없다. 애초에 그런 걸 하겠다고 만든 영화가 아니다. 1950년대는 바야흐로 일본 상업영화의 최전성기였다. 불과 몇 년 전에 원자폭탄을 맞은 나라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혹은 그러하기 때문에 더욱) 영화를 많이 만들어 냈다. 거리엔 이야기들이 넘쳐 났다. 자기 극복의 서사, 자기 연민의 서사, 공동체 복원의 서사, 공동체 파괴의 서사. 일본인들은 이야기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거의 모든 것들을 이야기로 만들어 냈다. 아톰과 고지라도 이때 태어났다. 대동아공영권과 원자력과 방사능마저도 그들은 이야기로 갈아 마셨다. (아톰을 만든 그 코가 큰 박사님은 파푸아뉴기니 출신이다. 코주부 박사님은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이 만들어 낸 재패니즈 드림 성공신화다.)

동경이야기(1953), 오즈 야스지로

오즈 야스지로는 그러한 이야기의 태풍 속에서 홀로 고고하게 멈추어 있었다. 그는 수다쟁이 이야기꾼의 인중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천천히 막고 찻잔을 오래 감상하는 옛 일본인들처럼 생의 풍경들을 오래 들여다보는 영화를 만들어 냈다. 다다미방에 앉아서 꽃이 피고 지는 창밖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오즈 야스지로는 그것이 진정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들 속에서 몇몇 대사가 오가고 삶이 피었다가 지었다. 젊은이는 늙은이를 피하고, 늙은이는 추억에 사로잡혀 있으며 여름엔 선풍기가 필요하고, 차가운 정종엔 그게 걸맞은 잔이 필요하다. 그러는 사이에 기차는 우리 삶의 길목과 방향 사이에서 어찌 됐든 오고 간다. 노인네 같은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깔끔한 노인네는 여태껏 없었다. 오즈 야스지로는 눈만 뜨면 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시대에 ‘노인다움’도 낡지 않고 이렇게 새로울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동경이야기>는 이후 그대로 우리 시대의 고전이 되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들처럼 <동경이야기>는 현대의 많은 영화와 시간과 공간을 같이 나누어 쓰는 결합된 사진의 오래된 흑백 원본이 되었다.

카페 뤼미에르(2003), 허우샤오시엔

허우샤오시엔의 <카페 뤼미에르(Café Lumière, 咖啡時光)>(2003)는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영화다. 우리나라엔 2005년에 개봉했다. 개봉일로부터 벌써 14년이 지났다니, 시간이 빠른 화살과 같다는 옛말이 새삼스럽다. 1953년엔 오즈 야스지로가 50의 나이로 <동경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은 해니까 <카페 뤼미에르>와 <동경이야기> 사이에 딱 50년의 시차가 존재한다. 그동안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카메라는 타이베이의 전철역에서 출발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어떻게 펼쳐질까? 이후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아니 살고 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런 것도 이야기라 부를 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시간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영화를 이야기라 부를 수 있다면, 우리의 시간 시간도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매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이 순간들을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저 먼 우주로 사라져 버리는 현재를 우리는 이야기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카페 뤼미에르(2003), 허우샤오시엔

<카페 뤼미에르>에는 이야기가 없다. 뤼미에르 형제는 카메라에 빛을 담아 과거를 재연하는 데 성공했다. 과거의 사진이 현재와 동시에 존재하기 시작했다. 뤼미에르 형제의 1895년을 우리는 영화의 시작이라 부른다. 뤼미에르 형제는 달세계를 여행하는 영화를 찍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왜 달이었을까. 태양도 아니고, 은하수도 아니고.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당연히 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달은 그야말로 우리가 마음에 담은 모든 이야기의 원천이 아니었던가. 우리가 영화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면, 가장 먼저 우선 달에 다녀와야 했다. 달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했어야 했다. 그래서 뤼미에르 형제는 달나라에 가기로 했다. 영화는 그 첫 출발이, 이야기를 찾아서, 우리 삶의 원천을 찾아서 떠나는 것이었다. <카페 뤼미에르>는 오즈 야스지로에게 바쳐진 헌사이면서, 동시에 영화에 바치는 헌사이다. 영화는 크고 거대한 어떤 것이 아니었다. 영화는 어쩌면, 무더위를 피해 잠시 들른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이거나, 빗방울 소리로 가득한 처마에서 보내는 시간일 것이다. 우리는 그런 멍한 시간 속에서 무의미의 눅눅하고 습한 쾌감을 따라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여기는 어디인지를 묻게 된다. 우리는 질문만 있고 대답은 없는 이 오랜 길 위를 걷고 있다.

카페 뤼미에르(2003), 허우샤오시엔

여름이다. 이제 좋았던 6월은 가고, 뜨겁고 긴 여름이 펼쳐질 것이다. 푸르고 푸르다 결국 어두워지는 나뭇잎 사이로 매미들이 우는 소리가 흘러나올 것이다. 골목의 그늘에 앉아 부채질하는 할머니들은 수박 파는 아저씨의 ‘수박이 왔어요’ 방송 소리에 수박 한 통을 산 뒤 동네의 이웃들과 함께 나눠 먹을 것이다. 할머니에게 수박 한 조각을 얻은 꼬마들이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 이제 정말 여름인 것이다. 한국 영상 자료원에서 7월 2일부터 <영화와 공간: 도쿄>라는 주제로 일본의 영화들을 상영한다. <동경이야기>도 물론 포함되어 있다. 아 물론 <동경이야기>의 원천을 따라 일본을 찾아온 빔 벤더스의 <도쿄가>도 포함되어 있고,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과 레오 카락스와 미셀 공드리 감독이 함께 연출한 아오이 유우의 <도쿄!>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의 지루하고 무덥고 맑은 허우샤오시엔의 <카페 뤼미에르>도 포함되어 있다. 전철을 타고 찾아가 그 여름을 함께 견딜 것이다. 사랑하는 영화여. 우리의 영화는 원래 그렇게 지루하고 맑은 방랑, 쨍한 햇빛과 그늘,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멍하니 앉아 저 먼 우주로 보내버려야 했던 전철역에서 보내던 여름이었다.

우리의 영화는 그저 전철역에서 보내던 여름.
영화를 많이 봅니다. 영화보다는 극장을 좋아합니다. 영화는 그저 그런 영화가 많은데 어두운 극장은 어두워서 늘 새롭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