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2년 무렵, 미군(美軍)을 휩쓴 지포는 신드롬에 가까웠다. 당시의 지포라이터는 병사들의 필수품이자, 미군의 아이콘이었다. 미군이 포로로 잡히면 라이터부터 빼앗긴다는 웃지 못할 일화까지 떠돌았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미군의 상징, 지포라이터는 ‘사나이의 상징’이기도 했다. 두 번의 국제 전쟁을 거치며 그 이미지는 더욱 고착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지포라이터’와 ‘남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끈끈한 무언가로 묶여버렸다. 그렇게 한데 엮인 지가 올해로 87년째다.
이토록 오랜 세월, 변함없는 이미지를 가진 제품이 또 있을까. 놀랍다면 놀라운 일이다. 도대체 어떤 길을 걸어왔기에 지포라이터는 수십 년간 ‘남자의 로망’으로 불리게 된 걸까.
강인한 녀석, 지포라이터의 탄생

지포라이터가 호주산 벤젠라이터에서 비롯됐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창업자 조지 블레이스델(George G. Blaisdell)이 우연히 본 벤젠 라이터에서 지포의 역사는 시작됐다. 그가 본 건 바람에 잘 꺼지지 않는 오일라이터였다. 이 라이터는 뚜껑과 몸체가 분리되어 있어, 사용하는 데 불편함이 있었다. 당시 블레이스델은 한 손엔 몸체를, 한 손엔 뚜껑을 들고 담뱃불을 붙이던 지인을 보며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뚜껑과 몸체가 붙어 있다면 참 편할 텐데…’
그 길로 그는 ‘지포 매뉴팩처링 컴퍼니(Zippo Manufacturing Company, 이하 지포)’를 설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1932년, 뚜껑과 몸체를 경첩으로 연결한 최초의 지포라이터가 출시됐다. ‘핑’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열리는 뚜껑, ‘치익’ 소리를 내며 불붙는 심지, 매캐한 기름 냄새, 반짝이는 금속 외관,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수십 년간 이어온 지포라이터의 탄생이었다. 초기 지포라이터는 경첩이 밖에 붙어 있었다. 경첩이 뚜껑 안으로 들어간 지금의 모습은 1936년 완성됐다고 한다. 지포라이터가 첫 번째 특허를 받은 것도 이즈음이었다.
출시 당시 지포가 전면으로 내세운 건 방풍 라이터(windproof lighter)였다. 지포라이터는 자연 바람에 쉽게 꺼지지 않는 라이터로 이름을 알렸다. 지포가 내걸었던 게 또 하나 있는데, 바로 평생 품질 보증제다. 블레이스델은 “지포라이터가 작동하지 않으면 무료로 고쳐준다”며 평생 AS를 보장했다. 사실 이는 지포의 AS가 뛰어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고장 없는 라이터란 의미였다. 강하고 튼튼하고 내구성 높은 라이터라는 건데, 이런 강인한 속성은 지포라이터가 남자의 로망으로 여겨지게 된 배경과 묘하게 맥을 잇기도 했다.
남자의 로망으로 자라난 지포라이터

지포라이터가 대중화한 시점은 제2차 세계대전부터라는 게 중론이다. 1942년 12월, 미군 참전이 결정되면서 지포는 군용 지포라이터 생산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 기간에 민간 판매는 전면 중단했다.
수백만 미군이 지포라이터를 들고 전 세계 전장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 파급력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 이즈음 해서 지포 브랜드 속에는 미국의 아이콘, 강하고 거친 군인의 이미지가 녹아들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을 거치며 지포라이터와 관련한 온갖 에피소드도 쏟아져 나왔다. 불꽃이 꺼지지 않는 지포라이터를 폭발물에 던져 적장을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고장 난 헬기 계기판을 지포라이터로 비추며 안전하게 착륙했다는 이야기, 병사들이 헬멧에 수프를 넣고 지포라이터로 데워 먹었다는 이야기 등 지포라이터와 함께 산전수전을 겪은 군인들의 이야기가 수없이 꽃을 피웠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날아오는 총알을 막았다는 이야기다. 영화로 다뤄질 법한 이 엄청난 이야기는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다.
매섭게 총알이 오가는 전장. 일순간 안드레즈 중사의 가슴팍을 향해 총알이 날아들었다.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그는 목숨이 끊어졌다 생각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가슴팍을 더듬어 보니 지포라이터가 있었고, 라이터 몸체에 총알이 박혀 있었다.
지포라이터가 날아오는 총알을 막아줘 목숨을 구했다는 이 일화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카더라’가 아니다. 지포에서 제품 홍보에 대대적으로 활용할 정도로 사실을 근거로 한 이야기다.
전쟁 에피소드와 지포라이터의 시너지 효과는 실로 드라마틱했다. 단단한 외관, 반짝이며 시선을 사로잡는 금속 마감, 거칠고 강인한 이야기들이 절묘하게 만나면서 ‘지포라이터 = 남자의 물건’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지포라이터는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을 거치며 남자라면 탐낼 만한, 남자라면 가져야 할 하나의 아이템으로 자라났다.
지포의 탁월한 브랜딩

지포라이터가 남자의 로망으로 굳어진 데는 사실 지포의 역할도 컸다. 그만큼 이들은 제품이 가진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노출하는 데 앞장섰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홍보하면서 ‘지포라이터’와 ‘남성성’을 그럴듯하게 버무렸다. 지포라이터는 지포의 지원에 힘입어 거친 남성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클리셰가 되기도 했다.

2001년 방영된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보자. HBO를 대표하는 전쟁 드라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군의 활약상을 그렸다. 드라마 속에선 전장 한복판에서 담배를 태우는 군인들의 모습이 자주 나온다. 전쟁의 고단함과 괴로움을 담배 한 개비로 잊는 그들… 그리고 그들의 손엔 늘 지포라이터가 쥐어져 있었다.
지포라이터가 멋스럽게 등장한 이 콘텐츠를 지포가 그냥 놓아둘 리 없었다. 이들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 한정판을 출시하며, 지포라이터를 탐하는 뭇 남성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콘스탄틴>은 지포라이터가 정말 매력적인 소품으로 사용된 영화다. 주연으로 나온 키아누 리브스는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피운다. 그의 손에도 늘 지포라이터가 있다. 키아누 리브스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장면은 그야말로 감탄을 자아낸다. 한 손으로 ‘착’ 뚜껑을 열어젖히고 눈살을 찌푸리며 담뱃불을 붙이는 그의 모습은 끊었던 담배마저 피우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지포라이터가 남자의 로망이란 이미지를 얻은 데는 이 영화가 한몫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콘스탄틴> 속 지포라이터는 애초에 할리우드 영화 소품 전문가 러셀 보빗(Russel Bobbitt)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소품이었다. 이 사례만 보아도 지포가 얼마나 영리하게 지포라이터를 브랜딩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다. 지포는 각종 영화에서 인상 깊게 등장했던 지포라이터를 모티브로 신제품을 개발하기도 했다. 지포의 탁월한 브랜딩 감각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역시 남성적 이미지는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지포라이터 그 이상의 지포

지난 87년간 지포는 안정적인 성장을 유지했다. 2012년엔 5억 번째 지포라이터를 생산했을 정도니 회사는 여전히 건재하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과거의 명성 덕분이라 말한다. 하지만 모르는 소리다. 지포의 브랜드 파워가 굳건한 데는 시대에 맞춰 변화하려는 이들의 노력이 숨어 있다.
지포가 마냥 탄탄대로를 걸어온 건 아니다. 가장 큰 위기는 금연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증가한 것이었다. 변화하는 시대 앞에서 지포는 제품의 소구점을 바꾸거나, 또 다른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몇몇 기사를 통해 유추해 보면 지포라이터 판매 대수가 근 몇 년 사이 꽤 줄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2013년 판매 예상 대수가 약 1,130만 대였다. 전성기인 1996년과 비교하면 35%나 감소한 수치다. 2013년 이후 시간이 좀 더 흘렀고, 궐련형 전자담배 열풍까지 불었으니 판매량은 더 줄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은하철도999 × 지포라이터 컬래버레이션 한정판. 고양이 캐릭터 쿤캣(Kun Cat)과 만난 지포라이터.
지포 역시 이를 인지하고 제품 다양화, 이미지 변화, 제품군 확대 등 여러 방면으로 자구책을 펼쳤다. 대표적인 것이 컬래버레이션 지포라이터다. 그레고리 W 부스 지포 前 최고경영자는 ‘예술성을 바탕으로 한 소장품으로서의 지포라이터’를 강조한 바 있다.
그의 계획에 맞춰 지포는 예술가와 협업한 제품, 은하철도999・태권브이 등 미디어 콘텐츠를 접목한 제품, 신년 한정판과 같이 다채로운 지포라이터를 내놓으며 제품에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했다. ‘담배’, ‘거친 남성’, ‘군인’ 등과 버무려져 남성성 짙은 과거의 이미지를 넘어서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남성성을 중심에 두는 건 변함없었지만, 다양한 가지치기를 통해 브랜드 이미지를 조금씩 조금씩 변화시켰다.

지포가 국내에 선보인 팝아트 컬래버레이션 제품을 보자. 아기자기하고 톡톡 튀는 이미지가 돋보인다. ‘남성=지포라이터’란 이미지를 깨부수기에 충분한 디자인을 보여준다. 동시에 남녀를 불문하고 소유욕을 자극한다. 이외에도 디자인 & 컬래버레이션 지포라이터는 셀 수 없이 많다. 지포에 따르면 보유한 라이터 디자인 수만 30만 개란다.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으면 지포가 브랜드 이미지를 다각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느낄 수 있다.

그레고리 W 부스 前 최고경영자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포를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로 포지셔닝 할 계획도 밝혔다. 라이터 이외의 제품을 지속해서 추가한다는 계획이다. 실제로 지포는 핸드워머(오일손난로), 아웃도어 가방, 지갑, 시계, 향수 등 한층 다양해진 제품을 꾸준히 출시하고 있다.

방풍라이터로 시작해 라이프 스타일 제품으로 ‘변화’를 꾀했던 브랜드. 그러면서도 거친 남성의 이미지를 놓지 않는 ‘고집’도 좀 부릴 줄 아는 브랜드. 이들의 역사를 톺아보면, 지포는 과연 ‘유연하면서도 곧은 심지’를 가진 브랜드라 부를 만하다. 지포가 80여 년간 한 자리에 정체하거나 퇴보하지 않고 꾸준히 성장한 이유는 아마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거다. 지포라이터가 오랜 세월 남자의 로망으로 기억되는 이유 역시 여기서 찾을 수 있을 테고.
유연하면서도 굳은 심지. 이들의 신조가 변치 않는 이상, 아마도 앞으로도 지포라이터는 ‘영원한 남자의 로망’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다.
남자를 완성시키는 지포 아이템 3종
– 클래식 지포라이터

클래식은 강하다. 시대가 변해도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클래식 지포라이터가 주는 가치 또한 여전하다. 크롬, 브라스(황동)로 만들어진 이 지포라이터는 80년이 넘도록 투박하고 거친 남성미를 뽐낸다. 은은한 유광의 몸체로 신사의 품격을 더해준다. 과하지 않고 딱 적당하게. 절제된 남자다움을 표현하는 데는 역시 클래식 지포라이터가 제격이다.
– 디자인 & 컬래버레이션 지포라이터

스트릿 아티스트 벤 아인(Ben Eine)과의 컬래버 제품(우).
늘어진 오버 피트 후드티, 발목을 타이트하게 조여 주는 조거 팬츠, 그 위로 길게 늘여 올린 양말, 머리 위엔 꼬리를 길게 뺀 모자, 한 손엔 팝아트로 장식된 지포라이터. 그야말로 힙(Hip)의 완성이다. 디자인 & 컬래버레이션 지포라이터는 클래식이 줄 수 없는 힙한 감성을 듬뿍 선사한다. 클래식만으론 만족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최고의 패션 아이템이 되어 준다.
– 지포 핸드워머

상남자에게 웬 손난로냐 묻지 마라. 사랑하는 그녀를 위한다면 지포 핸드워머는 필수 중의 필수다. 주머니에 쏙 들어가 6시간 동안 온기를 내뿜는 지포 핸드워머. 따뜻하게 데운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주든, 차가운 그녀의 손을 온기 가득한 주머니로 데려오든, 무엇을 선택하든 핸드워머가 당신의 사랑을 더욱 뜨겁게 달궈줄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