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수 없이 많은 제품이 넘쳐 흐르고 있는 무선 이어폰 시장에서 이제 나의 눈길을 끄는 녀석들은 거의 없다. 에어팟처럼 편의성의 극을 보여주거나, 젠하이저 모멘텀 트루 와이어리스처럼 환상적인 음질을 가졌거나, QCY T1처럼 깨끗한 음질에 가격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싸거나 한 게 아니라면.

그런 와중에 와디즈에서 크라우드 펀딩 중인 완전 무선 이어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웰벤트(Wellvent)’라는 제품이었는데, 적절히 저렴한 가격대에 블루투스 5.0과 SBC, AAC 코덱 지원, 이어버드 단독 6시간의 든든한 배터리, 그리고 무엇보다 독특한 모습의 케이스가 나의 관심을 발동시켰다. 그래서 조금 살펴본 뒤 6만3천원을 결제했다.
며칠 뒤 받아본 웰벤트의 모습은 예상대로 평이했다. 원가 절감을 위한 종이상자에 케이스, 이어버드, 이어팁, 그리고 마이크로 USB 케이블, 명조체의 한글 매뉴얼이 단출하게 들어있었다.

웰벤트의 가장 큰 특징은 케이스다. 양쪽 끝에 이어버드를 각각 꽂아 충전하는 방식이다. 이어버드를 살짝 눌러서 넣고 뺄 수 있다. 짤깍거리며 들어가고 튀어나오는, 이 손맛이 꽤 괜찮다. 케이스가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크기인데, 음악을 안 듣고 있을 때는 엄지로 계속 이어폰을 누르고 싶어진다. 짤깍 짤깍, 반대로 돌려서 다시 짤깍 짤깍. 옛날 카세트 플레이어의 쫄깃한 일시 정지 버튼이 생각난다. 피젯 토이 부럽지 않다. 부피가 작고 가벼워서 휴대성도 아주 좋다. 약하게나마 서로 자석으로 붙기도 해서 안정적이다.
이어버드는 한쪽당 4.2g으로 가벼운 편이다. 착용감도 괜찮다. 하우징이 귀를 압박하지 않고 귓구멍에만 가뿐하게 꽂히는 형태다. 그러나 귀 윤곽 밖으로 꽤 많이 튀어나와 프랑켄슈타인처럼 되기 때문에 아무리 내가 내 모습을 못 본다 해도 신경이 쓰이긴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단점이라 생각되는 부분은 귀에 꽂을 때 진동판이 찌그러지는 느낌의 찌걱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맨 처음 꽂는 순간 뾱뾱- 거리길래 ‘에어팟처럼 귀에 꽂힌 거 인식해서 소리가 나는 건가?!’ 했는데 그런 거 없고 그냥 안에서 뭔가가 찌그러지는 소리였다. 이런. IP67 등급의 방수 방진 덕분에 하우징이 빈틈없이 정교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망상의 자위를 하기엔… 다소 심하다. 그래도 음악 듣고 있을 때는 안 나니까 참고 넘어가 보자.

8mm의 그래핀 드라이버를 탑재한 웰벤트의 음질은 저음역과 중음역, 그리고 극고음역이 강조된 느낌이다.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따뜻하며 살짝 어두운 음색이다. 화사하진 않아도 전체적인 해상력과 박진감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보컬은 촉촉함을 넘어서 축축한 인상인데, 저음역보다 고음역이 상대적으로 치고 나오지 못해서 균형감이 조금은 무너진 듯한 느낌이 든다. 맑고 화사한 음색을 선호한다면 맞지 않고, 음질 디테일보다 분위기 자체가 중요한 음악에 그나마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끈적하고 뭉툭한 그루브 위주인 로파이 힙합 정도.
통화 품질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조용한 곳에서는 소통이 매우 원활했고, 시끄러운 야외에서는 한두 차례 답답함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면 완전 무선 이어폰치고는 넉넉한 점수를 줄 만하다.
연결 안정성은 대체로 안정적인 편이다. 1주일 동안 사용해봤을 때 복잡한 대중교통이나 길거리에서 음악이 끊기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다만 한적한 대로변을 산책할 때 의외로 수차례 소리가 튀는 현상이 나타났다.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 날씨가 추워서 힘들었나? 무심코 지나쳤던 상가 건물에 수맥이라도 흘렀던 걸까?

이어버드는 터치를 인식해서 컨트롤이 편하다. 한번 탭으로 재생과 정지, 왼쪽과 오른쪽을 각각 두 번 탭해서 볼륨 조절, 세 번 탭해서 트랙 이동을 할 수 있다. 컨트롤의 반응 속도는 좀 느려도, 터치 인식률 자체는 매우 좋아서 살짝만 터치해도 잘 작동되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세게 건드리면 진동판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또 들릴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긴 하다.
멀티 페어링 같은 걸 지원하진 않지만, 한번 스마트폰에 페어링해놓으면 나중에 케이스에서 꺼낼 때 자동으로 페어링이 완료되는 점은 편하다. 왼쪽, 오른쪽을 각각 단독으로 사용할 수도 있어서 상황에 따라 유용하게 쓸 수도 있다. 배터리는 스펙 상 표기된 6시간보다는 다소 짧게 느껴지지만, 체감적으로 4~5시간 정도는 충분히 버텨준다.

그렇다면 전체적으로 종합해봤을 때 웰벤트는 괜찮은 이어폰인가? 라는 생각을 해보기 이전에, 몇 가지 킹리적… 아니 합리적 의심이 드는 부분을 짚고 넘어가 보자.
와디즈에서 크라우드 펀딩이 시작되었던 2018년 9월에 알리익스프레스에서도 동일한 모습의 제품이 판매되고 있던 걸 포착했다. 케이스의WELLVENT 로고와 이어버드의 W 로고가 없는 모습이긴 하지만 케이스의 충전 단자와 LED, 삽입 구조, 이어버드, 제원까지 살펴봤을 때 거의 동일하게 보이는 제품이다. 게다가 현재는 이름과 로고만 다르고 디자인은 또 똑같은 다른 제품이 국내 오픈몰에서도 판매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건 아마 중국에서 저렴하게 만들어진 기성 제품에 로고를 붙이고 패키지를 살짝 보강하는 수준으로 재판매를 했던 게 아닐는지? 크라우드 펀딩도 마케팅의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었을지…
이와 비슷한 경우를 모 넥밴드 블루투스 이어폰을 통해 한 차례 경험했었다. 업체에서는 분명히 자체적으로 개발한 제품이라 주장했지만,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디자인에 로고만 다른 제품들이 인터넷에서 속속 보이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중국에서 제작된 물건을 사들여 재판매했던 거로 밝혀져 시끌시끌했었다. 이러하니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있나.
물론 웰벤트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정황상 그렇게 느껴지는 거지만 크라우드 펀딩의 본래 의미와는 다소 이질감 있는 부분들이 보인다는 점에서 찜찜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이 업체는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관리를 잘하긴 했다. 배송도 원활했고, 참여자에게 피드백도 꼬박꼬박 잘 줬고, 친절한 모습을 잃지 않았던 점도 인상적이었다.
어쨌든 뭐 어때, 맛만 좋으면 됐지. 제품만 보면 그 자체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음색은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존재할 수 있겠지만 케이스 구조와 휴대성, 착용감, 안정성을 고루 따져봤을 때 아주 좋다고 하긴 힘들어도 그럭저럭 쓸만한 편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다만 2만원에 불과한 QCY T1을 중심으로 저렴한 가격대의 완전 무선 이어폰이 워낙 많아진 탓에 이제는 웬만한 음질이나 디자인, 혹은 편의성이 아니라면 경쟁력을 갖추긴 갈수록 어려워 보인다. 찜찜한 그을음이 살짝 남은 크라우드 펀딩이긴 했지만 물건은 충분히 잘 사용했다. 앞으로 나올 제품들은 좀 더 매력적이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