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지나간 시간은 추억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흐르고 있고 그렇게, 과거는 계속해서 만들어진다. 그 누구도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과거는 더욱 아름답고, 현재의 순간은 그만큼 더 값진 것이 아닐까?

갑작스런 감상에 당황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두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을 만나고 나면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동안 한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20년 전에도 얼리어답터는 있었다. 물론, 공식적인 명칭만 없었을 뿐 인류가 생겨나고 문물이 발달하기 시작한 당시에도 분명 얼리어답터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아이템을 선택했고, 또 한참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002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첫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이었던 얼리어답터 김용준 대표의 소개로 만난 공감채널N의 김재학 대표는 약 20여년 전 얼리어답터 시대를 가장 활발하게 보냈던 세대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4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지만 그 때의 열정은 더욱 커져만 갔고, 오히려 경제력까지 갖추게 되면서 보다 적극적이고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006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이를 대변해주듯이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그의 사무실은 예사롭지 않았다. 지나간 시간을 하나하나 붙잡아둔 듯 세월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재미난 물건들이 가득해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슈베르트의 음악과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 향이 더해져 편안한 느낌마저 들었다. 처음 가본 장소였음에도 오랜 단골 카페를 찾은 듯 정겨웠다.

잠시 분위기에 홀려 정신 없이 둘러보는 우리 일행을 위해 손수 내린 더치커피를 한 잔 가득 담아 내온 그. 그의 현재 직업은 뉴미디어 광고 대행사 CEO다. 젊은 시절부터 광고대행사에 몸을 담고 늘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광고인의 삶을 살아온 그였기에 일찍부터 얼리어답터의 세계에 뛰어들 수 있었다.

003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소니 아이보 ERS 3 시리즈 라떼 모델

자리에 앉자마자 머리를 갸우뚱 거리며 귀여운 소리를 내는 로봇 강아지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무언가를 물어보듯 말을 거는 로봇 강아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어쩔 수 없이 어색함과 긴장감이 감돌기 마련인데, 귀여운 로봇 강아지 덕분에 자연스럽고 화기애애하게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얼리어답터와의 인터뷰다 보니, 뭔가 특별한 아이템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예전 얼리어답터 시절 최첨단 아이템이었던 아이를 데려왔어요.” 어렸을 적 소중히 하던 장난감을 찾아낸 듯 반가운 표정으로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약 15년 전 나왔던 소니 아이보 ERS 1,2,3 시리즈 중 3시리즈 라떼 모델이에요. 지금은 단종되어 구하기도 어렵죠. 소프트웨어를 어떤 것을 넣는가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제품인데 예전엔 인기가 상당해서 아이보 방송이 따로 있었을 정도예요. 방송 시간에 맞춰 TV 앞에 아이보를 가져다 두면 알아서 학습을 하고 지능이 발달합니다. 그때 당시, 언어가 일본어와 영어밖에 없다 보니 C프로그램을 이용해 한국어 버전을 만들어 직접 넣곤 했어요. 얼굴에 달린 카메라의 시선으로 랩탑에서 모니터링을 하는 등의 튜닝도 했었죠. 정말 이것과 관련한 재미있는 추억이 많았는데… 한동안 보관만 하다 7년만에 다시 꺼냈더니 배터리가 방전됐네요. 리필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막힘 없이 술술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 속에서 그의 애정과 관심이 느껴졌다. 지금 들어도 신기한 기술인데, 이미 15년 전 제품 이야기라니! 약 20여년 전 얼리어답터와 현재의 만남에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까지 들었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에 질문을 쏟아냈다.

“처음부터 얘기하자면… 인터넷 태동기 시절부터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요. 고등학교에 다니던 무렵, 삼보 트라이젬이 등장했고 그 때는 코볼, 포트란 같은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울 때였습니다. 그러다 윈도우가 출시되고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시작했죠. 광고인의 삶을 살기 시작한 때부터는 자연스레 최신 IT 분야와도 접목이 되었고 그 즈음 웹서핑이라는 단어도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웹서핑을 하면서 얼리어답터 사이트를 처음 접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 모여있더군요. 그 때는 키덜트라는 말은 따로 없었지만 어른 내면의 동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아이템들이 가득해서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004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업무 특성 상 해외촬영으로 출장도 자주 다니고 일본 기업과의 제휴로 2년 동안 교환사원으로 일본에 거주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수집이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사실 그 시절은 제대로 된 과자도 없었고 새알 초콜릿이나 바닐라/초코 아이스크림이면 최고였던 시절이었는데, 일본의 앞선 문화의 경험은 그야말로 신세계였죠. 장난감, 피규어 등 만화 속 주인공을 현실로 볼 수 있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어요. 꿈이 현실이 되는 느낌이랄까요? 처음에는 작은 열쇠고리부터 시작해서 점차 분야를 늘려가며 하나 둘씩 사 모았습니다. 사실, 그 시절 우리 세대는 경쟁심이 강했기에 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더 열심히 모았던 것 같네요.”

009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그 당시 가장 관심이 갔던 아이템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 때 웹과 함께 등장했던 키워드가 로봇이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마징가Z나 태권V, 건담 같은 것들은 우리에게 권선징악의 영웅 같은 존재였잖아요. 그런 주인공들이 화면 속에서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니 구매욕이나 소유욕을 자극하기 충분했죠. 그 당시 해외 CF 촬영이 많아 여러 나라로 다닐 기회도 많았기에 그 지역을 상징하는 인형이나 피규어를 구매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은 말 그대로 슈퍼 영웅의 문화가 강하고 일본은 피규어에도 인간적인 모습이 많이 담겨있는 것 같아요. 일본 만화 <마징가Z>에 등장하는 뚱뚱한 모습의 보스 로봇만 해도 우리는 열광하지만 미국에서는 인정받지 못하죠.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도 일본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싶네요.”

Q.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계시다는데, 각 분야별 초보자를 위해 추천하는 아이템이 있나요?

“남자들은 똑 같은 것 같아요. 분야가 다양하다고는 하지만 복잡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아무리 많아도 카테고리가 10가지를 넘어가지 않죠. 카메라, 오디오, 자전거(운동), 피규어, 자동차/자전거, 시계, 문구… 아! 요즘 또 먹방이 대세니까 요리까지! 최근 주변에 주방용품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더군요.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남자들의 장난감 첫째가 오디오, 둘째가 카메라라고 생각하기에 오디오 얘기부터 해볼까 합니다. 물론 대부분 오디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진을 좋아하고,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디오를 좋아하기 때문에 떨어질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005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오디오는 워낙 개인차가 심하고 진공관까지 가면 EL34, 6L6, 6T 등 종류도 많고 내용이 너무 많아 설명이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가성비가 높으면서 그냥 오디오 보다는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소개할까 해요. 사실 요즘엔 블루투스 라던가 IT에 접목된 것들이 많긴 하지만, 그런 유행과 관련된 것은 시간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의 얼리어답터들은 트렌지스터 라디오 같은 제품을 직접 만들어 사용하던 세대이기 때문에 대부분 콘덴서도 직접 갈고 튜닝도 할 줄 알거든요. 고장이 났을 때 어느 곳이 잘 고치더라 하는 정보들도 공유하고, 어떤 오디오에서 소리를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서는 어떤 콘덴서를 바꾸니 좋더라 하는 정보도 공유하곤 하죠. 고장 나더라도 고쳐 쓰는 재미까지 쏠쏠합니다.”

014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브라운 PS500 턴테이블

“개인 차가 있을 수 있지만, 우선 독일 브라운사의 PS500 턴테이블을 추천합니다. 1960년대에 나온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멀쩡하게 잘 돌아가는 것은 물론, 소리의 깊이가 있어요. 흔히 우리가 이어폰이나 블루투스 같은 기기로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죠. 그리고 잘 알다시피 애플 디자인의 모티브가 된 디터 람스의 디자인으로, 현재의 제품들과 견주어도 전혀 떨어지지 않아요. 오히려 이보다 좋은 디자인을 아직까진 보지 못했거든요”

015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보통 클래식을 많이 듣는 편이지만, 팝을 들을 때에도 매우 만족스럽다며 나탈리 콜의 음반을 꺼내 틀어주는 그. 그의 자신 있는 표정 뒤로 깨끗하면서도 풍부한 사운드가 흘러나왔고, 한동안 멍하게 그녀의 목소리에 취할 수 밖에 없었다.

007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네임 네이트원 (Naim Nait 1) 인티앰프

“앰프는 네임 네이트원 (Naim Nait 1) 인티앰프예요. 이 정도면 충분히 PC-Fi 용도로 사용하기에도 무난하고, 60년대 출시된 제품이지만 단자가 있기 때문에 아이폰과 연결도 가능하죠.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운드를 느낄 수 있어 정말 좋고 이베이나 중고 장터에서 70~80만원 정도면 구입할 수 있어 부담이 덜한 것도 장점이에요.”

016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스털링 (Stirling) 3/5A V2

“스피커는 스털링 (Stirling) 3/5A V2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제품은 BBC 방송국에서 모니터링을 할 때 사용되는 제품이에요. 굳이 오디오를 위해 몇 천 만원씩 투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정도의 구성으로도 우리나라 일반 가정집에서는 실컷 기분을 내기도 충분해요. 턴테이블부터 앰프, 스피커까지 모두 합쳐 중고로 300만원 정도면 하이앤드의 오디오 라이프를 즐길 수 있는 셈이죠.”

먼저 경험한 사람들이 전하는 진짜 이야기

“사실 이게 얼리어답터의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부분 초보 얼리어답터들은 신혼집을 꾸미면서 오디오를 장만하게 되는데, 누군가가 이런 정보를 공유해주지 않는다면, 같은 300만원으로 어떻게 이 구성을 만들고 이런 사운드를 만들어내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대충 300만원대의 적당한 오디오 제품을 골라 그냥 듣는 것으로 만족하겠죠.”

020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Q. 사진을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요. 카메라는 어떤가요?

“카메라는 정말 많은 제품들을 접해봤고 또 소유하고 있지만 메인으로 사용하고 있는 제품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라이카입니다. 라이카는 일본의 다른 카메라 제품보다 기능적인 부분에서 많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빛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말이 있듯이 그 특유의 색감과 공간감이 매우 뛰어난 제품이죠. 옛날 모델부터 근래의 것까지 어느 하나 실패가 없는 제품인데, 특히 렌즈! 라이카 렌즈는 정말 예술입니다!”

“현재 모든 사진을 필름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어요. 찍기만 해도 바로 바로 데이터로 저장되는 디지털 카메라가 훨씬 편하기는 하지만 하나하나 현상하고 인화하고 스캔하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사진에 대한 애착도 커지더군요. 일상에서 뜻 밖의 상황을 마주하고 그 모습 그대로를 담아내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 즐겁고 매력적이어서 앞으로도 사진은 놓지 못할 것 같아요.”

pozx

가장 좋아하는 취미도 사진이고, 가장 오래 된 취미도 사진이라는 그는 약 10여년 전부터 운영해왔다는 개인 블로그를 보여주었다. 짧은 글귀와 함께 직접 찍은 사진 작품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는데 그 안의 내용들만 보더라도 상당히 오래 전부터 사진을 좋아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남들은 그냥 스쳐 지나갔을 일상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그의 시각으로 담아냈고, 그들이 사는 모습 속에 내가 있는 것 같아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의 작품은 pozx.net 블로그에서 감상할 수 있다.

“재미있는 이야긴데,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고 나서 피규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아무래도 사람들이 사진은 찍고 싶은데, 모델 사진은 제약이 많고. 그러다 보니 다들 캐릭터 사진을 엄청나게 찍어대더군요. 그런 가지각색의 캐릭터 사진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저런 아이템이 내 책상 앞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 그렇게 캐릭터에 대한 관심이 삶의 한 부분이 되더군요.”

40대 얼리어답터의 마음을 빼앗은 선로 위의 기차

“키덜트 분야는 워낙 광범위 한데다 종류도 많아 추천해드리기 조금 애매하네요. 피규어로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하나의 아이템을 선택한다면 로봇이나 기차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긴 하는데요. 전 키덜트의 끝판왕이라 하는 기차/철도를 수집합니다.”

008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플라이쉬만 (Fleischmann) Schienenschleifwagen

“기차에는 크게 유럽형과 일본형이 있어요. 먼저 유럽형 기차인 이 제품은 플라이쉬만 (Fleischmann)제품으로, 재질이 다이캐스트 (Die-cast) 즉, 메탈입니다. 무게가 상당하죠?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40~50만원정도 하는 제품이에요. 아래쪽에 사포 느낌의 작은 부분이 있는데 기차가 지나가면서 레일을 닦아 전기가 잘 흐르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독일 브랜드답게 정말 부드럽게 잘나가요. 기차의 취미는 기차를 모으는 것이 아닌, 레일을 모으고 어떻게 꾸미는지가 더 중요한 거거든요. ‘디오라마 (Diorama)’라고 하는데, 마을을 꾸미고 철도를 건설하는 재미에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가끔 명절 때나 크리스마스 때 크리스마스 트리 대신 레일을 꾸며놓고 기차를 운행시키면 색다른 재미도 있고 의미도 큽니다”

011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토믹스 (Tomix) 유후인노모리

“일본은 나라 자체가 기차의 역사가 깊고 모든 백화점이나 맛집 등의 상권이 지하철 역 중심으로 되어있는 기차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렇다 보니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기차에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우리도 잘 아는 JR이라던가 신칸센 등 각 구간마다 대표하는 기차도 있고요. 전 대부분 그것들을 다 모으긴 했는데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유후인노모리를 가져와봤습니다. 후쿠오카와 ‘힐링 마을’로 손꼽히는 유후인 사이를 왕복하는 기차예요.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기차 피규어를 토믹스 (TOMIX)와 카토 (KATO)라는 두 곳에서 만드는데 이 제품은 토믹스가 만든 모델이고 4량 구성의 플라스틱 제품입니다. 일본은 피규어 하나를 만들어도 허투루 만들지 않고 역사적인 배경이나 지도, 노선 등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써서 제공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나이가 들면서 변한 것 중 하나가 피규어를 함부로 사지 않게 된 것인데요. 완성도가 아주 높거나, 소장 가치가 있는 것들만 사게 되다보니 언제부턴가 기차를 모으게 됐네요. 수 많은 취미 중 하나예요.”

027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무언가를 기록하는 일은 본능과도 같기에 더욱 익숙한 문구류

책상 한 켠에 만년필 케이스와 여러 개의 펜, 연필, 연필깎이까지. 문구점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 문구류에도 관심이 많은지 여쭸다.

“관심이야 정말 많죠. 평소 연필로 무언가를 적는 그 느낌을 좋아해서 다양한 제품을 수집하고 있어요. 얼리어답터와는 거리가 조금 멀 수도 있지만, 문구류에서는 만년필을 추천하고 싶네요. 요즘 만년필은 성향이 양극으로 나뉩니다. 실용성과 명성. 라미나 파이롯트, 그리고 최근에 모나미에서 저렴하면서 성능이 꽤 좋은 만년필이 출시되었는데 이런 것들이 전자에 속하죠. 후자로는 많은 분들이 몽블랑을 생각하실 텐데, 그건 너무 흔한 것 같아 오늘은 오로라 제품을 소개할까 해요. 오로라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만년필인데 이 회사 제품이 한번 써보면 그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 바로 닙 (Nib, 펜촉) 차이 때문이죠.”

010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저도 아직 수집 중인데 지금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바다를 상징하는 ‘해양 시리즈’ 중 이오니아 해와 아드리아 해, ‘대륙 시리즈’ 중 아시아와 아프리카, 단테시리즈 한정판-지옥, 단테 프로토타입 등입니다. 단테시리즈는 상당히 인기가 많은 제품인데 한국에서는 약 250만원 정도에 판매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워낙 희소성이 있는 제품이다 보니 구하기도 쉽지는 않죠. 저도 아직 몇 가지밖에 못 모았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이베이를 찾아봅니다.”

001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오로라 (AURORA) 해양시리즈, 대륙시리즈, 단테시리즈

“만년필의 필감은 연필과 매우 비슷해요. 우리가 연필 필감을 좋다고 하듯이 만년필을 쓰다 보면 볼펜을 거의 쓰지 않게 됩니다. 센스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혹은 성공의 상징이라 생각해서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무엇보다 우리가 아날로그 세대다 보니 손글씨에 대한 호감이 여전한 것 같아요. 만년필로 쓸 때의 사각사각하는 그 느낌이 정말 좋습니다.”

“처음 만년필을 쓰는 분들이라면 F닙으로 사용하시는 게 글씨를 연습하기 훨씬 좋아요. 또한 한글에 가장 최적화된 아이템은 오로라 제품입니다. 한글이 정말 예쁘게 잘 써져요. 몽블랑은 영어에 최적화 되어있어서 한글은 안 예쁘게 써지니 알아두시면 좋겠습니다.”

012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만년필 중에서 한 가지 추천을 해드린다면 주저 않고 오로라88을 말씀 드리고 싶네요. 몽블랑의 대표적인 모델인 마이스터스튁과 비슷한 디자인이면서도 필감이 매우 좋은 제품이에요.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을 만한 제품이라고 자신합니다.”

021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엘 카스코 (El Casco) 연필깎이

“연필을 좋아하시는 분들을 위해서는 엘 카스코 (El Casco) 사의 연필깎이를 추천하는데요. 지금도 출시 되고 있는 스페인 제품입니다. 일반적인 연필깎이 제품과는 깎는 방법이 다르고 이중 날 회전식 연필깎이여서 깎인 연필의 단면이 안쪽으로 곡선의 형태를 띠는 특징이 있죠. 새 제품은 약 40만원 정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 이베이에서 입찰을 통해 약 7~8만원 선에 구매했어요. 사놓으면 영원히 쓰는 아이템입니다.”

그 밖에도 그의 사무실에선 이런 저런 보물 아이템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은은한 향나무의 향이 코끝을 자극하던 1960년대 스테들러 연필, 앙증맞은 스테들러 스케일 자, 영화 속에서 편지를 봉인할 때 사용하던 실링왁스 인장, 풀테이프, 스페셜 에디션 후치코 등등. 문구점을 방문한 기분이었다.

022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귀여운 스탬프들과 뛰어난 색감의 사치하타 (Shachihata) 잉크

이것저것 설명하던 그가 갑자기 어린아이같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가지고 왔다. 평소 귀여운 스탬프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며 내려놓은 것은 귀여운 고슴도치와 팽귄, 로보트, 잉크병이 그려진 작은 스탬프였다. 너무나 귀여운 아이템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런 나의 반응에 뿌듯해하며 녹색 사치하타 잉크에 꾹꾹 눌러 보여주기까지.

사진과 오디오 취미를 같이하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문구에도 관심이 많아 자연스레 같이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져 쉽게 접할 수 있었다고 했다.

024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노트나 지갑도 직접 가죽 공방에서 만들어 잘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태닝이 되어 자연스러운 멋이 묻어나는 지갑을 보니 얼마나 자주 사용했는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019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세이코/세이코샤 트레인 워치

혹시나 하는 마음 반, 설마 하는 마음 반으로 시계에 대해서도 물었더니 마치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얼리어답터에 소개하고픈 제품이 있다며 곧바로 무언가를 가져왔다. 어떻게 관심이 미치지 않은 분야가 하나도 없는지 신기해지기 시작했다.

“손목시계는 워낙 많은 브랜드가 있고, 디자인도 천차만별이잖아요. 시계의 본질은 시간을 잡아주는 것이니, 가격 부담도 없으면서 시간이 너무너무 정확한 아이템을 소개해드리고 싶었어요. 가끔 중고 장터나 일본의 중고 시장에서 살 수 있는 트레인워치예요. 시계의 뒷면을 보면 기차 노선이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까도 얘기했듯이 철도문화인 일본에서 열차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지 위해 기차 운전석 앞쪽에 꽂아놓고 보는 시계죠!”

018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트레인워치를 들어 가만히 귀에 가져가니 채칵채칵 기분 좋은 시계의 심장박동 소리와 태엽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지털 시계와 웨어러블에 익숙해져 어느덧 기억 속에 사라져버린 시계초침소리가 반갑게 느껴졌다.

“세이코와 그 이전의 세이코샤 (SEIKOSHA)에서 나온 제품으로, 굉장히 빈티지하면서도 50년이 넘도록 시간이 정확하게 맞는 아이템이에요. 정장을 입을 때 포켓에서 꺼내 사용하는 포켓워치 대용으로도 좋고 차에 걸어두면 아날로그 워치처럼 사용할 수도 있고요. 특히 남자들에게는 멋진 아이템이죠. 가격도 20만원대로 매우 저렴해서 부담이 없습니다. 떨어뜨리지만 않으면 영원히 고쳐서 쓸 수 있고 만약 고장 났다면 서울 예지동에 수리해주는 곳이 많으니 알아두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

Q. 이렇게 많은 분야에 신경을 쏟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종류가 워낙 많아지다 보니, 사람이 방을 만들게 되더라고요. (웃음) 혼자 살 때는 방 하나면 충분하다가 결혼을 해서 배우자와 아이가 생기면 방이 여러 개로 늘어나듯이 오디오 룸, 피규어 룸, 기차 룸, 암실 등등 다양한 방에 대한 욕심이 생기네요. 남자의 끝은 집이라는 얘기도 있던데, 다 이런 이유인가 봐요. 내 아이템을 더욱 향유할 수 있는 아지트를 만들고 싶은 욕심.”

028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사실, 이런 것을 하나로 묶는 말은 얼리어답터인 것 같아요. 얼리어답터라는 말을 조금 확대해석 한다면 ‘능동적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 다니게 하고, 제품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좀더 많은 의미를 재생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지인들을 만나 얘기하다 보면 다들 똑같이 얘기해요.

키덜트 제품에 조금씩 관심을 보이던 우리가 점차 다른 카테고리로 확장되고, 이베이가 발달하면서 세계의 보물들이 눈앞에 들어오니 보물찾기를 하듯 더욱 많은 제품들을 접하게 되고. 세상에 존재하는 그 수많은 물건들을 전부 가지지는 못하니 자기 색깔에 맞고 자신을 잘 표현해주는 아이템에 국한하여 발전시켜 나가는 거죠. 개성적이면서 남들과 다른 차별성을 가진 제품을요. 또, 예전에는 새로운 것에 대한 신기함과 소유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아이템을 취했었다면 요즘은 ‘의미’를 많이 담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나이에 맞는 취미를 찾아가고 있는거겠네요.”

Q. 이런 아이템들을 구입할 때 주의해야할 점이나 팁이 있나요?

“최근 기사에도 많이 나오지만, ‘가치소비’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즉, 손해보지 않도록 세컨마켓까지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나중에 가치가 떨어지는 제품은 사용하지 않죠. 그런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선 나이 많은 얼리어답터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경험을 통한 장단점을 이야기해주니까요.”

013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브롬톤 (Brompton) 자전거

“제가 타는 자전거, 브롬톤도 작게 접어 차에 넣고 다니면서 언제 어디서든 꺼내 즐길 수 있어 좋고 가까운 곳을 다니거나 시장에서 장을 보기에도 좋아 활용도가 높은데요. 액세서리 하나하나가 꽤 비싸긴 하지만, 중고로 팔 때에도 가격이 잘 떨어지지 않는 가치소비가 가능한 아이템이라 할 수 있어요.

젊은 친구들 중에도 빈티지를 좋아하는 분이 많은데 그 시절 제품들을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물건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 시대의 명기나 명품에 대한 교류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겪어본 것에서 오는 경험치라는 것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거거든요. 그런 교류가 가장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는 곳이 커뮤니티인 것 같아요. 분명 제품을 선택할 때 큰 도움이 될 테니 커뮤니티 활동도 열심히 하고 오프라인 모임도 되도록 참여해보세요.”

Q. 그런 커뮤니티 활동도 직접 하고 계신가요?

“물론이죠. 계절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요즘 같은 여름에는 자전거 모임도 나가고 겨울에는 만년필 관련 모임도 나가곤 합니다. 만년필 정모에 나가면 능력자들은 고가의 펜을 가지고 나와 시필을 해볼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줘요. 사실 젊은 친구들은 그런 자리를 나와야 그런 비싼 제품들을 써볼 기회가 생기니 열심히 나오죠. 비록 너무 비싸서 지금 당장은 사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계기로 마음 속에 씨앗이 자라나게 되는 거고요. (웃음) 만년필 정모가 정말 재미있어요.”

017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Q.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사실, 우리나라에서 여건만 되면 아직 도전하지 못했던 비행기에 대한 욕심이 있어요. 한 5년 전 즈음 경비행장에 지인 분이 계셔서 타본 적이 있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스팀보이’ 애니메이션에서도 그렇듯 남자는 쇳냄새 나는 기계와 관련된 취미를 본능적으로 좋아하나 봐요. 그리고 누구나 하늘을 날고 싶은 꿈이 있잖아요. 사실, 제 원래 꿈도 파일럿이었어요. 비록 무산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경비행기를 몰아보고 싶은 꿈은 버리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비행기 면허증을 따기도 쉽고 이용하기도 정말 쉬운데… 기회가 된다면 꼭 도전해보고 싶어요.”

“인생은 의미있는 YOLO”

Q. [얼/리/만/사]의 두 번째 주인공이 되었는데 인터뷰를 한 소감이 궁금합니다.

“정말 우연한 기회를 통해 인터뷰를 하게 됐지만, 그 옛날 얼리어답터 시절이 지금의 나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돌아볼 수 있는 계기도 됐던 것 같아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인생은 욜로 (YOLO, You Only Live Once)라는 말이 있잖아요. 단 한 번 주어진 삶, 비록 공수래 공수거지만 내가 숨쉬는 동안 이런 것들을 알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뜻 깊었고 그때의 열정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덕분에 7년간 묵혀두었던 아이템도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네요. 나의 소중한 아이템들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026_김재학대표님 인터뷰

말 그대로 인생을 버라이어티하고 즐겁게 살고 있는 중년의 얼리어답터, 공감채널N 김재학 대표와의 만남이 끝을 향했다. 놀랍게도 약 두 시간 가까이 함께한 시간 중 적막이 흘렀던 시간은 거의 없을 만큼 대화의 주제가 넘쳐났고 미처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부분도 많았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진행된 인터뷰 덕분에 내용을 정리하며 이 글을 작성한 에디터는 며칠 밤을 새웠다는 후문.

마지막으로 오랜 애독자의 입장에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얼리어답터 사이트에 바라는 점이 있는지 물었다.

“지금도 잘해나가고 있지만 조금 더 깊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의 제품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으로, 전문가 칼럼과 같은 코너를 한 두 가지 추가하면 보다 가치 있는 얼리어답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얼리어답터는 1~2년 된 신생 미디어가 아닌 오랜 역사를 가진 미디어잖아요. 유명한 사람들의 한마디나 실 경험자의 지혜는 굉장히 의미가 있거든요. 장인이나 전문가를 많이 만나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제품이야기와 함께 담는다면 밸런스가 잘 맞는 사이트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얼리어답터와 역사를 같이한 그 시절 얼리어답터들을 만나 그들이 소중히 생각하는 아이템을 소개해보는 것도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앞으로 더욱 응원하겠습니다!”

김태연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할 제품들을 쏙쏙 골라 소개하는 친절한 가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