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지난달이다. 애플의 팀쿡이 ‘원모어띵’을 외치며 애플워치를 발표하자 긴장하던 스위스 하이엔드 시계 업계가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듯 했다. “스위스 시계 산업을 곤경에 처하게 할 것”이라는 조니 아이브의 호언장담은 ‘있잖아 애플 그거 해봐.jpg’의 말 풍선 속에 들어갈 대사를 하나 더했을 뿐, 당장 애플 워치가 전통적인 시계 애호가들의 손목을 차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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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와중에 애플 워치가 발매될 내년 초가 끔찍할 이들이 있으니, 애플 워치의 예상 가격대 근방에 위치한 쿼츠와 저가 기계식 시계 메이커들이다. 시계 전문 웹진 호딩키(hodinkee.com)의 창립자 겸 편집장 벤 클라이머는 쿠퍼티노 발표현장에서 애플 워치를 직접 경험한 후 작성한 리뷰에서 “애플 워치에서 볼 수 있는 전체적인 디자인의 수준은 간단하게 350달러 가격대의 시계들을 – 디지털과 아날로그 모두 – 압도한다”고 썼다. 기계식 시계를 멸종 직전의 위기로 몰았던 1970년대 쿼츠 쇼크와 달리 애플 워치의 등장은 기계식 대신 저렴한 쿼츠 시계에 직격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쿼츠(Quartz)는 이름 그대로 ‘수정’이라는 뜻. 배터리를 동력으로 빠르게 흔들리는 수정 진동자를 IC 회로로 계측, 디지털 또는 아날로그로 시각을 표시하는 장치다. 톱니바퀴와 스프링으로 가득한 기계식 시계보다는 라디오나 컴퓨터 등 초록색 기판으로 만든 전자 제품에 더 가깝다. 1969년 12월 25일, 일본 세이코는 최초의 쿼츠 손목 시계 아스트론을 발표했다. 처음부터 저렴하진 않았다. 아스트론 금시계의 가격인 45만 엔은 당시 중형차 한 대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전자 제품인 쿼츠 시계를 대량 생산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기계식 시계가 쿼츠의 정확성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대부분 쿼츠 무브먼트의 수정 진동자가 초당 3만 번 이상 흔들리는 데 비해 기계식 시계의 레귤레이터는 기껏해야 초당 3~6번 진동하기 때문이다. 시계 무브먼트의 정확성을 평가, 인증하는 기관 COSC의 하루 오차 기준이 기계식의 경우 5초 가량(-4초/+6초)인데 반해 쿼츠는 0.07초 이내다. 쿼츠 메커니즘은 충격에 강했고, 자성에 영향을 받지도 않았다. 비교할 수 없이 저렴했고, 정확했다. 온도 변화에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기계식 시계의 오차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스위스의 유서 깊은 시계 매뉴팩처 수백 곳이 문을 닫았고, 시계 장인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새롭고 정확한 기술이었던 쿼츠 시계는 더 새롭고 정확한 스마트워치의 탄생으로 인해 위기를 맞았다. 성급한 호사가들은 쿼츠시계의 종말을 떠들기도 한다. 그러나 쿼츠시계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소개할 5개의 쿼츠 시계 덕분이다.

빅토리녹스 ‘이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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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이버칼 만드는 그 빅토리녹스 맞다. 이녹스는 스틸 소재로 만들 수 있는 가장 튼튼한 시계를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선보인 시계. 130번의 테스트를 거쳐 제품을 출시한다는데, 그 내용이 어마무지하다. 불을 붙이고, 원심력 테스트 기기에 넣어 2시간 가까이 회전시키고, 10미터 위에서 떨어트리거나 64톤 탱크가 밟고 지나가도 정확하게 작동한다. 상황에 따라 검정색 범퍼를 탈부착할 수 있다. 60만원 대로 가격도 합리적이다.

 

진 ‘UX EZM 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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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가 실리콘 오일로 채워진 다이버 워치다. 높은 압력에서도 변형이 없어 방수 성능이 무려 5000미터에 달하고, 수중에서도 뿌옇게 보이지 않는다. 리튬 이온 건전지를 사용해 쿼츠 시계의 거의 유일한 약점인 온도 변화에도 영하 20도에서 영상 60도까지 작동에 전혀 문제가 없다. 독일 브랜드 진 특유의 강인한 디자인도 매력적이다. 다만 실리콘 오일 때문에 배터리를 교환할 때 번거롭겠다. 해외에서 ‘직구’한 물건이라면 본사가 있는 독일로 보내야 한다고.  400만원 대.

 

오메가 ‘스페이스마스터 Z-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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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 오메가 파일럿 워치의 디자인을 물려받은 비행용 시계. 쿼츠의 장점 중 하나는 기계식으로는 구현하기 힘든 다양한 기능을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2개의 시간대와 국제 표준시를 표시할 수 있으며 알람 기능, 윤년이 와도 날짜를 조정할 필요가 없는 퍼페추얼 캘린더 기능, 라면 끓일 때 가장 유용한 크로노그래프 기능과 카운트다운 타이머 기능도 있다. 비행 기록도 10번까지 할 수 있다고. 무엇보다 이건 달에 착륙한 오메가 스피드마스터의 후예다. 스마트 워치엔 이런 역사와 이야깃거리가 없다. 600만원 대.

 

그랜드 세이코 ‘스프링드라이브 SBGA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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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처럼, 시계에도 하이브리드가 있다. 하이브리드 자동차처럼 역시 일본이 선두주자다. ‘스프링 드라이브’는 건전지가 아닌, 태엽으로 가는 쿼츠 메커니즘이다. 기계식 오토매틱 시계처럼 손목의 움직임에 따라 로터로 태엽을 감고, 태엽이 풀리는 힘으로 전기를 만들어 쿼츠를 구동한다. 투명한 시계 뒷면을 통해 보이는 메커니즘은 스프링을 조였다 풀었다 하는 레귤레이터가 없는 걸 빼면 기계식 시계와 거의 똑같다. 기계식 시계의 공예적인 아름다움과 쿼츠의 정확성을 겸비했다. 초침도 기계식 시계처럼 흐르듯 움직인다. 다만 비싸다. 800만원 대. 가격을 더 낮추기 힘든 건 워낙 정교한 메커니즘이라 일본 세이코 본사의 가장 숙련된 장인 밖에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브라이틀링 ‘이머전시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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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틀링은 자사에서 생산하는 모든 시계의 무브먼트에 COSC 인증을 받는 거의 유일한 브랜드다. 일반적인 쿼츠 무브먼트보다 10배 가량 정확하고, 온도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슈퍼 쿼츠’ 시계에서도 선두주자. 이 무지막지하게 생긴 물건은 이름처럼 위급한 상황에 조난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슈퍼 쿼츠 시계다. 시계에 설치된 안테나를 돌려 빼면 초소형 송신 장치가 조난 신호를 발생시키고, 정확한 위치를 전송한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신호를 모두 발생시킬 수 있다. 작년 바젤월드에서 이 시계를 소개하던 스위스인 브랜드 매니저는 “잘못 작동하면 헬기가 날아올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1만 5천 달러. (약 1천 550만원)

 

기계식 시계 산업을 되살린 건 손목 위에서 박동하는 작은 기계 장치의 매력을 애틋하게 그리던 사람들이었다. 특유의 공예적 아름다움 역시 쿼츠 시계가 줄 수 없는 것이었다. 뒷면을 투명하게 만들거나, 앞쪽을 뚫어서까지 그 안의 정교한 세부를 드러내려 하는 건 그 아름다움이 기계식 시계의 존재 이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쿼츠 역시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몇 만원짜리부터 시작되는 강력한 가격 경쟁력, 또 1년 이상 가는 배터리 수명, 방수, 방진 기능. 그리고 멋진 스타일. 앞으로도 쿼츠 시계는 영원할 것이다. 인류의 손목이 남아 있는 한은 말이다.

 

정규영의 시계 이야기 연재순서

1. 기계식 시계 입문을 위한 5개의 시계

 

글: 정규영 /  편집 : 김정철 / 본 컬럼은 얼리어답터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규영
갤러리아 매거진 피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