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영화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은 ‘주말의 명화’와 ‘토요명화’ 뿐이었다. TV 브라운관 한 구석에 ‘주말의 명화’라고 다음 방송 안내와 함께 광고가 나올 때면, 미리 화장실에 다녀오고 새우깡 한 봉지를 뜯어 놓은 후 경건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이불 속에 누우면 한 주를 보람차게 보낸 것 같은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요즘은 많은 영화들을 쉽게 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리모컨 버튼 몇 번 누르면 영화가 쏟아지는 통에 뭘 봐야 할지 고르지도 못할 정도로. 주말에 한가로이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TV를 켜면 정말 뭘 봐야 할지 모르겠어. 너무 많아!

그래서 영화 몇 편을 소개해 본다. 이왕이면 딱 요즘 볼 만한, 봄내음 나는 영화. 외투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요즘처럼 마음도 가벼워질 만한 영화로 말이다. 화창한 날에 밖에 나갈 일이 없다고 슬퍼할 필요가 없다. 봄을 느끼는데 이렇게 좋은 영화가 또 없으니까!

하나와 앨리스

(멜로/로맨스, 2004, 135분, 일본,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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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 몰카, 거짓말, 두 여자의 한 남자를 향한 집착, 사랑과 우정, 그 최후의 선택은? 😉

한 소년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두 여고생의 풋풋한 청춘 스토리. 학창시절을 너무 재미없게 보내서인지 이런 류의 청춘 영화를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다. 그 중에서도 ‘하나와 앨리스’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게 되는 영화다. 미대오빠 출신 ‘이와이 슌지’ 감독의 감성적인 영상미는 봄날 햇살 같은 이 영화를 더욱 따뜻한 색온도로 포장해준다. 한 4300K 정도? 평소 일드나 영화를 즐겨본다면 여기저기서 등장하는 까메오를 찾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 요소다.

영화 중반에 앨리스의 아버지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딸에게 만년필을 선물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아버지가 했던 이야기를, 좋아하게 된 남학생에게 그대로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 부분이 아마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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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가 선물 받았던 만년필, 세일러 1911 모델 마룬 컬러

이 모델은 일본 브랜드 세일러 만년필의 1911년 창업 년도를 기념하는 제품인 1911이다. 영국 선원이 들고 온 만년필을 보고 만년필 회사를 차리면서 회사 이름도 세일러(Sailor)로 지었다. 고민한 것 같기도 하고 대충 지은 이름 같기도 하고… 여담으로 자료 조사를 위해 세일러를 검색하다 보니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악을 용서치 않는 ‘세일러문’이 너무 많이 나와 당혹스러웠다는 후문.

그런데 왜 하필 마룬 컬러일까? 물론 따뜻한 느낌의 색이지만, 나라면 귀여운 딸에게 벚꽃이나 토끼가 그려진 세일러 Maki-e(마키에, 蒔繪) 시리즈 중에서 골랐을 것 같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멜로/로맨스, 드라마, 2011, 107분, 대만, 15세 관람가)

유치하게 살고 싶던 시절의 알 듯 말 듯한 아름다운 순간.

‘하나와 앨리스’가 한 소년을 바라보던 상큼한 소녀들의 이야기라면,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한 소녀를 바라보던 발칙한 소년들의 이야기다. 이전에 ‘말할 수 없는 비밀’ 이란 영화 말고는 대만 영화를 본적이 거의 없었는데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를 보고 나니 급 관심이 생겼다.

대만 영화들은 하나같이 아기자기한 장면들이 많아 마치 예쁜 그림들이 가득한 동화책 속 삽화처럼 느껴졌다. 순정만화 같은 ‘하나와 앨리스’에 학창시절의 추억이 떠오를 정도의 감정 이입이 안 되는 아저씨들이라도, 이 영화라면 아련한 기억 속의 사춘기 시절을 떠올리며 웃음 지을 수 있지 않을까?

학급의 문제덩어리 남학생들과 그 친구들이 같이 바라보던 한 명의 소녀. 그 시절 모두의 눈에 빛이 나듯 반짝이던 소녀. 션자이 역할의 ‘천옌시’라는 배우가 예쁘게 나오긴 했지만 내 눈을 사로 잡은 건 빛이 나는 풋풋한 외모보다 션자이의 손목에 감겨있던 노란색 손목시계였다. 그 정체는 카시오의 레트로 모델인 F-91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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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자이처럼 상큼한 매력의 노란색 워치, Casio F-91W

지샥 브랜드 이전에 출시됐던 레트로한 모델 카시오 F-91W의 모습은 그야말로 옛스럽다. 검은색 모델의 경우 그냥 옛날 전자시계 모양에 시커먼 색깔이 심심해 보인다. 그래도 션자이가 항상 손목에 차고 있던 상큼한 노란색처럼, 요즘은 화려한 색상의 밴드와 베젤이 적용된 모델들도 많이 나오고 있다. F-91W를 색상 별로 모아보는 재미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 코디하기도 좋을 거고, 만원대의 가격도 아주 저렴하니 부담 없으니까!

4월 이야기

(멜로/로맨스, 1998년, 67분, 일본, 12세 관람가)

새 학기가 시작되는 4월, 짝사랑 선배와의 사랑도 시작될까?

‘4월 이야기’는 ‘하나와 앨리스’와 마찬가지로 이와이 슌지 감독의 봄 영화다. 이번에 소개하는 봄영화 중 봄 오브 봄, 개인적으로 가장 봄 영화스럽다고 생각하는 영화. 매년 봄이 되면 어김없이 다시 찾아보는 명작이다. 평소 화려한 액션과 볼거리로 무장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잔잔한 기승전결 구조의 일본 영화가 그저 졸려서 끝까지 못 보는 영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 빠져버리면 계속해서 비슷한 류의 영화를 찾아보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다.

4월 이야기의 스토리는 아주 단순하다. 여주인공 카즈키는 고등학교 때 짝사랑 하던 야마자키 선배를 동경하던 나머지 그가 다니는 대학에 진학하고 선배를 만나게 됨. 끝! 우주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 따위는 등장하지 않는다. 낯선 환경에 대한 들뜬 기대,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짝사랑 하는 선배에 대한 설렘, 주인공의 감정을 조용히 관찰하며 이와이 슌지의 영상미에 빠져보자. 영화의 처음, 마치 인공 눈을 뿌리듯이 쏟아지는 벚꽃 장면부터 ‘아~ 내가 봄 영화를 보고 있구나’ 싶어진다. 우산을 돌려주러 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빗소리도 너무 듣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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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가 건네줬던, 평범하지만 특별한 빨간색 우산. 벚꽃 우산이라면?

첫사랑 선배가 날 알아봐 준 순간. 극 중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는 여자 주인공이 쓰고 있던 빨간 우산. 우산살이 부러져 버린 누군가가 버리고 간 우산이지만 선배가 건네줬다는 것만으로 여주인공은 너무나 행복해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 찢어지고 부러진 빨간 우산을 대신해, 비를 맞으면 화사하게 꽃이 피어나는 벚꽃 우산을 들어보면 어떨까? 우산에 벚꽃이 피면 내 얼굴에도 미소가 활짝 핀다.

건축학개론

(멜로/로맨스, 2012년, 118분, 한국, 12세 관람가)

세상에 찌든 어른이 되어 추억하는 젊은 스무 살의 청춘.

수지님을 국민 첫사랑으로 만든 세기의 명화.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만난 음대생 수지님… 아니 서연. 숫기 없는 승민은 계속해서 눈길을 사로잡는 서연에게 고백의 말을 전하지 못한다. 잡지 못했던 인연은 떠나가버리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각자 나름의 세월을 보낸 후에 서로의 기억이 흐려질 즈음 다시 만난다면 처음의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철없던 시절의 행동들은 시간이 흘러 돌이켜 보면 밤새 이불킥을 날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질 수도 있지만. ‘그땐 왜 말을 못했을까?’라고 후회를 하기 보단 당장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라도 지르는 편이 좋은 것 같다. 길지 않은 시간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왜 그랬을까 라고 후회하는 것보다 왜 하지 않았을까 라고 후회되는 일이 더 아쉬운 경우가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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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래?” 그 시절의 CD플레이어, Sony D-777

아직 서먹서먹한 사이의 승민과 서연이 옥상에서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함께 듣던 장면에 등장했던 CD플레이어, 소니 디스크맨 D-777. 소니라면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 ‘워크맨’. 디스크맨 D-777은 아직 워크맨이란 브랜드로 CD플레이어와 카세트플레이어의 브랜드가 통합되기 이전의 모델이다.

영화의 주요 장면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D-777. 납작하고 네모난, 일명 ‘껌전지’를 사용하는 모델인데, 영화에서는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AA사이즈의 배터리를 사용할 수 있는 외장 배터리 케이스가 달려있는 채로 등장한다. 왜 그랬을까, 더 정겨운 옛 모습을 보여주려는 이유였을까?

D-777 이전의 소니 포터블 CD플레이어들은 사각형의 투박한 디자인이 많았는데 CD 형상으로 둥근 곡선과 이전 모델보다 슬림한 디자인, 소니의 튐 방지 기능인 ESP(Electronic Shock Protection)까지 적용된 D-777은 소니의 CD플레이어 중 단연 명기로 기억된다. 아…! 소니와 파나소닉과 아이와가 다시 CDP를 팔아줬으면 좋겠다.

봄날은 간다

(드라마, 멜로/로맨스, 2001년, 106분, 한국, 15세 관람가)

계절이 바뀌듯 변해버린 사랑.

꽤 오래 전에 본 꽤 오래된 영화.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는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들려주는 방송을 준비 중인 지방 방송국 라디오 PD 은수를 만나게 된다. 어느 겨울 처음 만난 낯선 두 사람은 꽃피는 봄이 오면서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봄날이 가고 장마비가 내리는 여름이 되면서 헤어지고 만다. 평소 가족들 사이에서 웃을 일 없이 감정이 메말랐던 상우는 은수와 함께 있는 시간들이 더 없이 따뜻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커튼 너머로 비치는 오후의 따사로운 봄 햇살처럼. 그것과는 별개로, 그 한 마디의 대사가 이렇게까지 임팩트가 생길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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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채집하던 상우가 사용하던 헤드폰 Sony MDR-7506

소니 MDR-7506은 뮤직비디오 메이킹 필름등의 레코딩 장면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스튜디오 모니터용으로 널리 사용되는 모델이다. 10만원대의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대에 적당한 차음성, 그리고 보컬이 다른 악기 소리보다 한발 앞으로 나와있는 듯 부각되는 부스트감이 인상적이다.

영화 속의 상우가 실내 스튜디오가 아닌 야외에서 사용하는 장면이 약간 의아하긴 했지만, 가격대비 성능이 좋은 명기 중의 하나인 건 확실하다.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는 비록 은수의 마음을 담진 못했지만 MDR-7506을 사용하며 자연의 소리는 아주 멋지게 담아낸다. 한편의 CF처럼.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멜로/로맨스, 드라마, 2006, 116분, 일본, 12세 관람가)

단 한 번의 키스, 단 한 번의 사랑.

봄은 매년 찾아온다. 그리고 여름이 되고 가을, 다시 겨울. 계절의 봄은 매해 다시 찾아오지만, 인생의 봄날은 어떨까? 청춘? 첫사랑? 풋풋했던 사춘기 시절의 추억? 누군가에게 인생의 봄날은 여러 가지 단어로 추억될 수 있겠지만, 영화의 주인공 시즈루는 이 모든 것들을 일 년 중 가장 짧은 계절인 봄처럼 짧게 누리고 사라져 간다. 사랑하면 죽는 병이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일생을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고 어린아이로 살던 시즈루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만나게 된 마코토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마코토와 시즈루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바로 사진. 필자가 사진을 취미로 즐기고 있다는 게 뿌듯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에서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아름답게 묘사된다. 이 영화는 2003년에 제작됐던 ‘연애사진’이라는 영화를 본 작가가, 영화에 대한 오마쥬로 썼던 소설 ‘연애사진 또 다른 이야기’를 다시 영화화한 작품이다. 기회가 된다면 두 영화를 비교해 가며 감상하는 것도 영화를 즐기는 방법이 되겠다. 두 영화 중에 고르라면, 마무리가 뭔가 판타지스럽게 산으로 간 ‘연애사진’보다는 이 영화를 택하겠다. 그리고 히로스에 료코보다는 미야자키 아오이.

영화를 보고 나면 봄이 지나가기 전에 사진기를 들고 당장 밖으로 나가고 싶어질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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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코토가 쓰던 필름 카메라, Canon F-1

1971년 발표된 캐논 F-1은 당시 캐논 카메라 SLR 라인 중 최고급 사양의 시스템 카메라다. 바디 820g, 렌즈 380g 도합 1.2kg라는 무게다 보니 요즘의 콤팩트한 디카에 비하면 휴대하기엔 불편한 점이 있다. 하지만 셔터를 누를 때의 그 손맛과 깨끗하고 맑고 자신 있게 찰칵거리는 셔터 사운드는 아주 훌륭하다.

똑딱이 같은 디지털 카메라를 주로 사용했던 사람들이 수동 카메라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최소 필름 3통 정도는 날려 먹는 게 필수 코스. 그렇지만 F-1으로 찍은 사진들을 검색해서 몇 장만 본다면, 디지털 카메라에서 느낄 수 없던 특유의 감성이 마음에 다가온다. 중고시장에서 가끔 20~30만원 정도에 거래가 이뤄지고 있으니 살짝 관심을 가져볼 만도 하다.

봄날은 간다. 마치 映畫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