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였습니다.

친구 녀석이 보여줬던 돌핀 시계. 큼지막한 버튼들이 달려있고 튼튼해 보이는 외관이 괜스레 멋스럽게 느껴졌었습니다. 그 녀석은 그 커다랗던 버튼들로 게임을 할 수 있다고 자랑을 했었지만 한 번도 나에게 시계를 만져보게 해주지는 않았죠. 아빠가 사주신 소중한 시계라며. 중학교에 올라가서 만난 다른 친구의 돌핀 시계를 보고 게임 기능은 없다는 걸 알게 됐었죠. 얌체 같은 녀석. (지금은 얼굴도 기억 안 난다. 요놈아!)

부러웠던 돌핀시계
부러웠던 돌핀시계

 

손목시계를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군대라는 곳에 가게 되면서 꼭 필요할 거 같아 전자시계를 처음 사봤죠. CD 플레이어를 사려는 친구를 쫓아 남대문 시장에 갔다가 골목 노점에서 그냥 숫자 큼지막하게 보이고 불 들어오는 시계로 골랐습니다. ‘이거 튼튼하고 빠때리도 2년은 가니까 오래 쓸거야~’라던 노점상 아저씨가 말이 사실이었는지 신기하게도 전역하고 며칠 되지 않아 배터리가 다 되어버려 미련 없이 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또 몇 년이 지나, 취직하게 되고 월급이란 걸 받게 되면서 통장에 총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총알이 쌓일수록 근질근질해지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의 소리가 들립니다.

넵!
넵!

계속해서 반복되는 마음의 울림에 답하기 위해 이것저것 지르기 시작합니다. 통장을 비워둬야 매달 들어오는 월급이 더 반가워질 테니까요.

이것저것 지름이 계속되던 어느 날, 갑자기 머릿속이 번쩍합니다.

손목시계가 갖고 싶다.

사실 필요 없었습니다. 휴대전화를 늘 가지고 다니고,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직업이다 보니 모니터 한구석에는 항상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이미 있었으니까요. 시간이 정말 궁금한데 확인할 방법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를 일은 절대 없죠. 그런데도 갖고 싶었습니다. 손목시계. 이왕이면 어렸을 적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돌핀 시계 같은 전자시계로요.

 

지샥과의 만남

목표가 생겼으니 검색을 해야겠죠. 시계에 관심이 없었으니 정보가 없어 무작정 어떤 시계들이 있나 찾아봤습니다. 물론 백화점이나 시계 매장을 나가 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니까요. 인터넷에서 시계를 검색해서 모양을 살펴봤습니다. 좀 튼튼하게 생기면서 뭔가 많이 달린 게 좋아 보이네요. 때마침 소셜커머스에서 저렴하게 판매하는 제품이 있어서 덜컥 질렀습니다.

Casio G-SHOCK AW-591SC-7ADR
Casio G-SHOCK AW-591SC-7ADR

그렇게 첫 지샥을 가지게 됩니다. 10만원 남짓했던 가격에 튼튼하게 생긴 게 바늘도 있고 뭔가 잔뜩 달린 게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뭔가 새 걸 사서 기분이 좋았을 수도 있겠네요.) 이때까지만 해도 지샥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습니다. 튼튼하다는 거 정도?

다른 지샥은 어떨까?
다른 지샥은 어떨까?

언제나 그렇듯이 지름은 또 다른 지름을 부르는 법이죠. 그때부터 지샥이 궁금해졌습니다. 처음 시계를 고를 때 얼핏 본 지샥들의 모양이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하고 ‘지샥’으로만 검색해도 몇 페이지씩 나오는 제품들이 뭐가 틀린 지 궁금하기도 했죠. 바로 구글링 들어갔습니다.

 

G-SHOCK 절대로 망가지지 않는 시계

지샥의 아버지

1981년, 카시오의 한 연구원이 ‘절대로 망가지지 않는 시계’ 기획안을 제출합니다. 그의 이름은 ‘키쿠오 이베(Kikuo Ibe)’. 이런 황당한 기획안을 제출한 이유는 더 황당한데, 부모님께 선물 받은 손목시계를 바닥에 떨어뜨려 망가뜨린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었죠. 이후 키쿠오 이베는 상품기획자와 디자이너를 영입해 프로젝트 팀, ‘터프’를 결성하고 ‘지샥’을 탄생시킵니다.

터프하게 생기지는 않았네요.
터프하게 생기지는 않았네요.

키쿠오 이베가 지샥의 아버지는 사실이지만, 한 개인의 인생작은 아닙니다. 20대 젊은 신입사원의 의욕 과잉으로 치부할 수 있던 기획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카시오의 역할도 크죠. 개인과 기업이 일본 특유의 오타쿠 정신으로 합심한 게 지샥의 탄생 비결이라 할 수 있겠네요.

 

트리플 10

절대로 망가지지 않은 시계’라는 개발 초기의 콘셉트은 ‘트리플 10’으로 구체화됩니다.

09

10m에서 떨어뜨려도 충격을 견디고
10기압(수심 100m)에서도 방수가 되며
10년의 배터리 성능까지 갖춰야 한다.

당시 손목시계는 망가지기 쉬워 바닥에 떨어뜨리면 안 되는 귀중품으로 여겨졌습니다. 트리플 10은 그런 상식에 도전하는 것을 의미했죠. 물론 그 과정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프로토 타입만 200개 이상을 만들었고 구조와 부품 개선에는 18개월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1983년, 드디어 최초의 지샥인 ‘DW-5000C’가 출시됩니다.

1983-DW-5000C
1983-DW-5000C

야심 차게 출시한 DW-5000C. 하지만 출시 초기에는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투박한 디자인이 사람들에 어필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카시오는 포기하지 않고 아이스하키 선수가 경기용 퍽 대신 지샥으로 슛을 날리는 내용의 광고를 집행합니다. 이 광고는 허위 과장 논란에 휘말리며 법정 공방까지 가지만 결국 카시오의 승리. 오히려 사람들에게 지샥을 각인시키는 효과를 가져왔고 지금과 같은 인기를 얻기 시작합니다.

 

트리플 G

키쿠오 이베는 손목시계를 망가뜨린 충격이 엄청났던 것 같습니다. 브랜드 이름을 중력(Gravity)과 그 충격(SHOCK)을 견딘다는 의미로 지은 것을 보면 말이죠. 첫 번째 지샥인 DW-5000C부터 최신 모델에 이르기까지 베젤을 보면 온갖 단어가 가득 적혀있습니다. ‘튼튼한 거 아니까, 진정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G-SHOCK을 비롯해 PROTECTION 또는 SHOCK RESIST와 같은 단어가 가득합니다. 어떤 생각으로 지샥을 만들고 있는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자신감의 표현이 아닐까요?

06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냉정한 기준은 ‘트리플 G’로 발전되었습니다. 사실 업그레이드라기보다 트리플 10의 10m 기준이 좀 더 체계적으로 세분화되었다고 보는 게 맞겠네요.

SHOCK RESIST, 충격 방지는 기본이고
GRAVITY RESIST, 원심 중력도 견뎌야 하며
VIBRATION RESIST, 강한 진동까지도 버틸 수 있어야 한다.

테스트를 보면 오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처구니없습니다. 실제로 일부 지샥 모델의 경우 중력의 15배까지 견디며 비행기 장비에 요구되는 최대 수준(ISO 2669)을 능가합니다. 또한 1초에 1000회 진동을 약 10시간 동안이나 버텨 바이크 장비 기준(JIS D1601 CLASS 4 A) 이상을 기록하기도 하죠. 이외에도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고, 망치로 내려치고, 얼렸다가 녹이고, 반복해서 때리고, 흔들고, 깊은 물속에 잠수해야 비로소 G-SHOCK이나 PROTECTION, SHOCK RESIST를 당당히 적을 수 있게 됩니다.

07

손목시계에 저렇게까지 가혹해야 해?

지샥의 테스트를 보면 지샥이 망가지기 전에 제 손목이 먼저 없어질 것 같습니다. 오버 스팩으로 보일 정도로 믿음이 가네요. 지샥, 단순한 궁금함에서 시작했지만 알아갈수록 믿음직한 친구 같은 제품입니다.

 

지샥을 지르고픈 그대에게 연재 순서

[pt_view id=”98b155fe38″]

실장님
보기에 좋거나 쓰기에 좋은 걸 사고 싶지만 그냥 싼 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