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케이스는 정교하지만 연약한 기계장치인 무브먼트를 충격과 먼지, 습기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착용감과 디자인은 그 다음 문제였다. 회중시계 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브랜드, 롤렉스(Rolex)가 역사와 전통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시계 업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건 굴 껍질처럼 틈 없이 단단히 닫히도록 혁신적으로 설계되어 최초로 방수, 방진 기능을 갖출 수 있었던 오이스터(Oyster) 케이스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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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식 시계는 느리게나마 여전히 발전하고 있지만, 시계의 ‘혁신’이라는 것들은 복잡한 원리가 필요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필요성조차 이해시키기 어렵다. 머리카락보다 가는 헤어스프링을 실리콘으로 제작하면 자성에 영향을 덜 받을 수 있고, 팰릿 포크의 톱니를 두 개 대신 세 개로 늘리면 부품의 마모를 줄일 수 있지만 이미 쿼츠 메커니즘으로 수십 년 전 모두 해결된 문제들이다.

쿼츠 시대에 이미 완성된 디지털 표시 방식 외에 지난 수백 년간 시간을 확인하는 방식이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결국 기계식 시계에 남은 ‘실질적인’ 혁신은 케이스 소재뿐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거다. 기술의 발달로 예전엔 다루지 못했던 신소재는 전통적인 시계에 쓰이던 스틸과 골드보다 가볍거나 강성이 뛰어나고 표면의 독특한 질감도 새롭다. 최근 시계 케이스에 쓰이고 있는 다양한 소재와 각각을 대표하는 시계를 소개한다.

 

플라스틱: 스와치 시스템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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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쿼츠 메커니즘에 의해 괴멸 직전이었던 스위스 시계 업계를 되살린 건 플라스틱으로 만든 스와치(Swatch)였다. 플라스틱은 색상 표현이 자유롭고, 가벼우며, 무엇보다 저렴했다. 스와치는 이런 플라스틱의 장점을 십분 활용해 저렴하지만 패셔너블한 시계로 스위스 시계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기계식 시계가 다시 사람들에게 주목 받으며 플라스틱은 값싼 쿼츠 시계를 상징하는 소재가 되었다. 이런 플라스틱을 기계식 시계로 불러들인 곳 역시 스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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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판매를 시작한 ‘시스템51(System51)’은 단 51개의 부품으로 만든 기계식 시계다. 150달러(국내 19만3천원)라는 가격은 ‘스위스 메이드’라는 꼬리표를 단 기계식 시계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자체 생산’ 무브먼트였다. 세이코(Seiko)와 노모스(Nomos) 정도를 제외하면 웬만한 브랜드의 ‘자사 무브먼트’ 시계의 가격은 500만원 대를 훌쩍 넘는다. 그 비결은 역시 플라스틱. 케이스는 물론 무브먼트의 핵심 부품인 팰릿 포크와 이스케이프 휠까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알루미늄: 해밀턴 카키 파일럿 파이오니어 알루미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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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루미늄은 익숙한 금속이지만 시계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가볍고 가공하기 쉽지만 그만큼 강도가 약한 연철이기 때문이다. 비행기나 우주선에 쓰이는 강화 알루미늄 소재도 있지만 강도에 비해 긁히기 쉽다. 이 모든 문제에서 자유로운 인코넬(Inconel)이라는 니켈과 알루미늄의 합금이 존재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니켈에 알러지를 일으킨다. 게다가 알루미늄은 땀이 묻으면 변색되기 일쑤. 안 쓰이는 데는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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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해밀턴(Hamilton)은 대표적인 빈티지 스타일의 파일럿 워치인 ‘카키 파일럿 파이오니어(Khaki Pilot Pioneer)’ 라인업에 알루미늄 소재 제품을 더했다. 항공기에 주로 쓰이는 소재라는 이유가 재미있다. 알루미늄에 아노다이징과 그 외 자세히 밝히지 않는 여러 처리를 해 단점을 보완했다고 한다. 애플 아이폰 3GS의 거울 같던 뒷면이 바로 아노다이징 처리한 알루미늄이다. 손톱만 닿아도 스크래치가 남던 이 소재를 해밀턴이 어떻게 바꿔 놓았을지 궁금하지만 아직 제품이 나온 지 오래 되지 않아 장기 사용자의 리뷰를 찾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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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확실히 가볍다. 41mm 기계식 시계의 무게가 50g이라는 건 놀라운 수준. 비슷한 크기의 스틸 시계의 절반 수준이며 같은 브랜드의 티타늄 시계와 비교해도 20% 가량 가볍다. 가격은 1145달러(약 127만원)으로 해밀턴의 스틸 소재 파일럿 워치보다 비싸다. 같은 알루미늄 소재인 애플워치 스포츠 에디션의 저렴한 가격을 고려하면 다소 의아하다.

 

티타늄: 시티즌 에코 드라이브 새틀라이트 웨이브 F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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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늄은 장점이 확실한 소재다. 시계에 주로 쓰이는 그레이드 5 티타늄은 같은 강도의 스테인리스 스틸에 비해 절반 이하의 무게로 가볍다. 녹과 변색이 거의 없으며 피부에 닿았을 때 알러지가 생기지 않는다. 강도에 비해 스크래치가 쉽게 나는 편이지만 알루미늄과 달리 산화가 변색 없이 일어나 사소한 긁힘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티타늄의 이런 성질을 ‘자가 치유’라 표현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장점으로 티타늄은 스틸과 골드 외에 시계에 가장 흔하게 쓰이는 소재다. 다만 스틸에 비해 변형에 약해서 다이빙 워치의 소재로는 잘 쓰이지 않는다. 가격도 스틸에 비해 비싼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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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계 브랜드 시티즌(Citizen)은 티타늄의 장점을 강화한 ‘슈퍼 티타늄’을 개발해 신제품 ‘에코 드라이브 새틀라이트 웨이브 F900(Eco-Drive Satellite Wave F900)’의 케이스를 만들었다. 지난 3월 열린 바젤월드 2015에서 시티즌의 프리젠테이션 테이블에는 시계와 함께 희한한 물건이 하나 놓여 있었다. 철사로 만든 금색 솔. 기자들은 그 솔로 시계를 열심히 긁어댔지만 검은색 테이블에 금색 철 가루가 날릴 뿐, 시계에는 흠집 하나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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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강도의 케이스에 전파 수신 등 수십 가지 복잡한 기능을 마치 전자 제품을 만지는 것 같은 감각으로 조정할 수 있는 독특한 시계. 올 가을 출시 예정으로 가격은 2400달러(한화 약 265만원)다.

 

세라믹: 라도 하이퍼크롬 듀얼 타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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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유리, 시멘트, 석고 등이 모두 세라믹의 일종이다. 시계의 다이얼을 보호하는 사파이어 크리스털과 공예에 사용되는 에나멜과 다이아몬드 역시 세라믹으로 분류된다. 반면 시계 케이스에 쓰이는 세라믹은 이름은 같지만 이들과 성질이 다른 물질이다. ‘엔지니어링 세라믹’ 또는 ‘파인 세라믹’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고 싶어 관련 자료를 한참 들여다 봤지만 이해는커녕 해독하기조차 어려워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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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에 세라믹 소재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브랜드는 라도(Rado)다. 1990년 ‘세라미카(Ceramica)’라는 시계를 내놓은 이후 ‘긁히지 않는(Scratch-Proof)’이란 라도를 상징하는 마케팅 문구다. 강도가 높을뿐더러 표면에 부드러운 윤기가 흐르고 금속과 달리 피부에 닿았을 때 차가운 느낌이 없다. 그 후 샤넬이 내놓은 ‘J12’이 세라믹 소재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 시계지만 원조 제품을 골랐다. ‘하이퍼크롬 듀얼 타이머(HyperChrome Dual Timer)’는 크라운 없이 터치 방식으로 케이스 둘레를 손가락으로 훑어 시간을 조정하는 별난 시계다. 가격은 모델에 따라 313만원부터 371만원까지. 대칭 강박증 환자를 위한 완벽한 시계다.

 

카본: 벨엔로스 BR X1 카본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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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본은 최근 시계 케이스로 가장 각광받는 소재다. 가볍고 단단한데다 물결치는 듯한 표면의 독특한 무늬로 여타 시계와 한 눈에 구분되기 때문이다. 카본 역시 티타늄, 세라믹 등과 같이 가볍고 단단한 소재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야 시계에 쓰이기 시작한 건 가공의 어려움과 함께 일정 이상의 힘이 가해지면 유리처럼 깨졌기 때문. 이 문제를 해결한 건 대표적인 시계 명가의 하나인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 지난 2007년 여러 겹의 카본을 높은 압력으로 압축한 ‘포지드 카본(Forged Carbon)’으로 강렬한 검은색 케이스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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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마 피게 외에도 리처드 밀(Richard Mille), 파네라이(Panerai), 위블로(Hublot) 등 요란한 스타일로 구별되는 하이엔드 스포츠 시계 브랜드들이 포지드 카본으로 시계를 만들었다. ‘하이엔드’라는 말이 괜히 붙는 건 아니어서 이 브랜드의 카본 시계를 구입하려면 그야말로 ‘목돈’이 필요하다. 그나마도 대개 한정판이라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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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앤로스(Bell & Ross)가 그나마 합리적인 선택. 바젤월드 2015를 통해 발표한 ‘BR X1 카본포지(BR X1 Carbone Forge)’는 남성적인 포지드 카본 케이스에 스켈레톤 마감한 다이얼을 결합한 크로노그래프 시계다. 이쯤이면 브랜드를 대표할만한 최고급 컴플리케이션 워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일반적인 벨앤로스 시계의 가격대를 기대하면 안 된다. 250개 한정 생산하며 가격은 1만5천유로(약 1884만원)다.

 

얼리어답터의 시계 이야기 연재순서

1. 기계식 시계 입문을 위한 5개의 시계
2. 애플 워치가 두렵지 않은 쿼츠 시계들
3. 연약한 기계식 시계와 그 적들
4. 마이크로 브랜드 시계 베스트 5
5. 얼리어답터의 크리스마스 선물가이드 – 시계매니아들을 위한 선물
6. 2015 넥스트브랜드, ‘MB&F’ 
7. 세상에서 가장 독창적인 손목시계 7개
8. 2015 바젤월드에서 발견한 200만원대 이하 최고의 시계 5가지
9.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는 클래식 파일럿 워치 5가지

정규영
갤러리아 매거진 피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