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바젤월드는 예년과 사뭇 달랐다. 주요 브랜드들은 변변한 새로운 제품도 없이 색상과 소재만 살짝 바꾼 베리에이션 모델을 끝없이 내놓았고, 미학적, 기계적 한계를 극복하며 독자적으로 기계식 시계의 영역을 확장하던 하이엔드 브랜드들은 하위 브랜드의 영역으로 발을 들이며 이전투구의 양상을 보였다. 그나마 몇몇 브랜드에서 새로 나온 컬렉션들은 과거 1950~60년대 기계식 시계 황금기의 모델을 크기만 키워 복각한 것들이라, 이베이의 빈티지 시계 검색 창인지 바젤월드 쇼윈도인지 헷갈렸을 정도. 중국 시진핑 정부의 부패척결 정책 때문인지 해마다 나오던 12간지 리미티드 에디션도 더 이상 없었다. 스마트워치 역시 소문과 발표만 무성했지, 실제로 작동하는 제품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사람들은 모두 애플워치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애플은 부스조차 마련하지 않았다.

한없이 팽창할 것 같았던 스위스 시계 업계에도 이제 저성장은 현실로 다가온 듯하다. 하지만 현실적인 가격의 대중적인 브랜드들은 오히려 사정이 나았다. 윗급 브랜드의 혁신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것으로 흡수한 이들은 어느 때보다 합리적인 가격에 근사한 디자인, 안정적인 기능과 만듦새를 가진 제품을 내놓았다. 2015 바젤월드에서 발견한 200만원대 이하 최고의 시계 5가지를 골랐다. 빠르면 올 상반기, 늦어도 내년 초까지는 국내에 선보일 모델들이다. 이제부터라도 부지런히 돈을 모아야겠다.

 

부로바 아큐트론 II 밀리터리

01 Bulova

부로바는 뉴욕을 기반으로 하는 시계 브랜드다. 1875년 설립된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1930~40년대에는 세계 최고의 시계 브랜드 중 하나였다. 1941년엔 세계 최초로 TV 광고를 하기도 했다. 1960년엔 세계 최초의 전자시계 아큐트론을 내놓았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일본산 시계에 밀려 내리막을 걷다 지금은 실용적인 중저가 시계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부로바의 특징은 아큐트론 II로 불리는 고진동 쿼츠 무브먼트. 마치 기계식 시계처럼 초침이 다이얼 위를 부드럽게 움직인다.

‘아큐트론 II 밀리터리’는 빈티지 스타일 군용 시계의 디자인을 빌려온 시계다. 별다른 기능은 없지만 쿠션형 케이스가 근사하다. 가격은 375달러(약 41만원). 이 가격대에 뭔가를 베낀 것 같지 않으면서도 괜찮은 디자인의 시계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일론 나토 스트랩, 가죽 스트랩 등으로 줄질 하는 재미도 괜찮을 듯. 다가오는 여름에 부담 없이 차기 좋다.

 

빅토리녹스 이녹스 리메이드 인 스위스

02 Inox

스위스 군용 칼로 잘 알려진 빅토리녹스는 가성비 뛰어난 시계를 만드는 메이커이기도 하다. 10미터 상공에서 낙하해도 동작했고, 세탁기에 넣고 돌려도 동작했으며, 탱크가 밟아도 동작한 이녹스는 작년 발표 이후 즉시 빅토리녹스를 대표하는 시계가 되었다.

빅토리녹스는 올해 바젤 월드에서 이녹스에 빈티지 가죽 재킷을 입혔다. 똑딱이 단추로 간단히 탈착할 수 있는 가죽 케이스 역시 이녹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투박하지만 튼튼하다. 1백 년 이상의 수명을 자신할 정도. 250개 한정 발매되니 구입하려면 서둘러야겠다. 가격은 795유로(약 93만원). 세보이고 싶다면 이 이상의 시계가 있을까? 물론 실제로도 세다.

 

티쏘 PRS516

03 Tissot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의 매뉴팩처를 방문하고 온 선배에게 감상을 물었더니 대뜸 하는 소리가 ‘거기 일하는 시계 장인들 죄다 티쏘 차고 있던데?’였다. 스위스 기계식 시계 무브먼트의 절반 이상을 생산하던 ETA가 지난 2002년 스와치 산하 브랜드 외에 공급량을 줄이기로 결정한 이후, 스와치 브랜드 중 저가 라인을 형성하는 티쏘의 가성비에 필적할 스위스 시계 브랜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터스포츠 콘셉트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시계인 PRS516은 그 대표적인 모델이다. 타 브랜드의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에 비해 절반 이하 가격으로 60시간 이상의 긴 파워리저브 기능까지 더했다. 아쉬운 건 투박한 디자인과 45mm라는 부담스러운 케이스 크기. 티쏘는 올해 바젤월드에서 선보인 PRS516 신제품의 케이스 지름을 42mm로 줄이고, 입체적인 다이얼, 크로노그래프 버튼과 핸드의 줄무늬 등으로 디자인을 일신했다. 아직 가격을 발표하진 않았지만 지난 버전의 가격인 1450달러(약 158만원)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전망이다.

 

진 EZM 3 플리거

04 Sinn

플리거(Flieger)란 파일럿들이 착용하는 항공시계를 뜻하는 단어다. IWC의 ‘빅파일럿’과 ‘마크’ 시리즈가 큰 성공을 거둔 후 제니스, 라코 등 많은 브랜드에서 비행 중에도 시각을 확인할 수 있도록 단순한 디자인에 큰 사이즈 다이얼을 갖춘 항공 시계를 내놓고 있다. 올해 바젤월드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된 파텍필립의 칼라트라바 파일럿 트래블 타임 역시 여기 속한다.

튼튼한 고성능 시계를 합리적인 가격에 내놓는 독일 시계 브랜드 진 역시 이번 바젤월드에서 다이버 시계 EZM 3의 항공 시계 버전 EZM 3 플리거를 내놓았다. 고만고만한 항공 시계와 확실히 구별되는 디자인에 200미터 방수, 항자성 기능을 더했다. 다이얼의 ‘Ar’은 시계 내부의 부품을 부식시키는 습기를 없애기 위해 주입한 아르곤 가스를 뜻한다. 가격은 1490유로(약 175만원).

 

오리스 다이버 식스티 파이브

05 Oris

엔트리에서 하이엔드까지, 수많은 브랜드가 참여하는 바젤월드에서 중저가 시계가 주목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눈에 띄는 혁신은 고가 시계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근래 기억나는 시계는 초저가 기계식 시계인 스와치 시스템51 정도였다.

올해는 오리스가 해냈다. 1965년에 발표한 자사의 빈티지 다이버워치를 새로 만든 다이버 식스티 파이브는 개성적이면서도 균형감이 좋은 디자인으로 모두의 찬사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위로 볼록 튀어나온 사파이어 글라스에 3, 6, 9, 12시 사각 인덱스가 기울어져 보이는 느낌이 신선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40mm 케이스 역시 딱이다. 다이버워치에 100m 방수는 다소 아쉽지만, 그 이상이라면 이보다 두꺼워져 무겁고 불편하다. 가격은 1600달러(약 175만원).

 

얼리어답터의 시계 이야기 연재순서

1. 기계식 시계 입문을 위한 5개의 시계

2. 애플 워치가 두렵지 않은 쿼츠 시계들

3. 연약한 기계식 시계와 그 적들

4. 마이크로 브랜드 시계 베스트 5

5. 얼리어답터의 크리스마스 선물가이드 – 시계매니아들을 위한 선물

6. 2015 넥스트브랜드, ‘MB&F’ 

7. 세상에서 가장 독창적인 손목시계 7개

정규영
갤러리아 매거진 피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