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겠지만 오늘은 밥상 이야기로 시작해 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1순위는 늘 한정식이다. 그것도 정갈하게 차려진 한정식. 이를테면 밥, 국, 찌개, 나물, 구이 등 꼭 있어야 할 몇 가지만 상에 올린 오첩반상. 이런 상차림은 먹는 데도 부담 없고, 너무 모자라 아쉬울 일도 없다. 적당히 배를 채우고 물 한 모금 넘기면 “그것참 잘 먹었다” 소리가 절로 나오곤 한다.


갑자기 무슨 밥상 이야기냐 싶겠지만, 사실은 이 말을 꺼내고 싶어서 그랬다. 키크론 K4는 정갈한 한상차림을 접대받은 듯한 무선 기계식 키보드라는 것. 있을 거 다 있으면서 과하지 않는 구성의 키보드, 키크론(Keychron) K4를 2주간 써본 총평이다. 어떤 느낌인지 감이 조금 오시려나.


이번엔 100키 풀사이즈

있다 없으면 허전한 텐키

많은 현대인이 그렇듯 나 역시 심각한 결정 장애를 앓고 있다. 최근엔 기계식 키보드를 앞에 두고 결정 장애가 도졌다. 고민의 핵심의 텐키였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지 않나. 없어도 되겠다 싶은데, 또 있다가 없으면 아쉽고 섭섭하다. 애플워치 있다가 없으면 허전한 것처럼. 이 텐키라는 게 그런 존재다. 문자만큼 자주 누르진 않는데, 없으면 어색하고 불편하다. 텐키 영역에서 숫자를 누르는 것과 가로로 길게 늘어진 숫자 영역에서 누르는 것, 그 한 끗 차이는 꽤 크다.

그렇게 아쉬우면 그냥 풀사이즈 키보드 쓰라고? 우선 안 예쁘다. 공간 활용성과 효율성도 떨어진다. 텐키리스 키보드를 써본 사람은 알 거다. 어깨너비 안쪽으로 마우스와 키보드를 배치하고 빠르게 손을 오가며 일하는 그 쾌적함을.


그래서 세상에 나온 게 바로 키크론 K2였다. 콤팩트한 디자인이 강점인 84키 기계식 키보드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첫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맥/iOS/윈도/안드로이드/리눅스와 모두 호환하지만, 맥용 기계식 키보드로 더 유명하다. 그만큼 맥과 쿵짝이 잘 맞는다. 한눈에 봐도 맥북 키보드에서 따온 듯한 구성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어쨌거나 K2는 맥용 콤팩트 기계식 키보드로 인기몰이했다. 하지만 텐키를 탐하는 이들에게는 만족스러운 대안이 되지 못했다.


때마침 혜성처럼 등장한 게 있으니, 바로 키크론 K4라 할 수 있겠다. K4는 84키 K2의 장점을 고스란히 이어받으면서 텐키를 더한 100키 풀 배열 키보드다. 그러면서 미니멀한 디자인을 유지했다는 게 챠밍 포인트. 그렇다. 텐키와 콤팩트를 모두 만족하는 정갈한 기계식 키보드가 마침내 등장한 것이다. 이것으로 결정 장애 완벽 해결?


K2에서 다듬어진 K4

K4는 K2와 같은 디자인을 유지하면서 풀사이즈에 맞게 변형된 모습을 보여준다. 일렬종대로 서 있던 Home, End, Pgup, Pgdn, Del 키는 맨 윗줄로 올라갔다. 오른쪽 영역에는 텐키가 바짝 붙었다. 전작에 있던 캡쳐 키는 사라졌다. 크기는 다소 커졌지만, 104 풀사이즈 키보드와 비교하면 15%가량 줄어든 공간이 인상적이다.


ABS 소재의 키캡도 전작과 동일하다. 고급스러운 촉감은 아니지만, 매트한 느낌의 깔끔함은 유지했다. 키캡에 곡률을 주어 계단식으로 배열한 스텝스컬쳐(Step Sculpture)2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알루미늄 모델만의 견고함과 묵직함도 한결같다. 버튼 구성도 똑같다. 유선 연결을 위한 USB 타입 C 단자, OS 전환용 버튼, 유무선 전환과 OFF용 버튼이 좌측에 모여 있다. 패키지 역시 전작처럼 본체와 윈도용 키캡, 리무버, 케이블로 간결하게 구성됐다.

선택지는 K2보다 훨씬 넓어졌다. K4는 청축, 갈축, 적축, 황축, 4종의 게이트론 스위치 중 선택할 수 있다. 여기에 LK 광축 클릭(블루), LK 광축 리니어(레드), 2종의 옵티컬 스위치 또한 고를 수 있다. 조명은 화이트 LED와 RGB 중 하나를 정할 수 있다. RGB는 ABS 본체와 알루미늄 본체라는 옵션도 있다. 선택지가 꽤 화려한 덕분에 입맛에 맞게 취향에 맞게 들여놓기 좋다.

내가 가져온 건 ‘키크론 K4 옵티컬 RGB 백라이트 알루미늄 레드 스위치’ 모델이다. 이름이 참 거창한데, 그러니까 RGB 조명, 알루미늄 본체, 광축 리니어(레드) 스위치 구성의 키보드라는 거다.


소리 없이 강한 LK 광축 리니어

타건감은 준수하다. 적외선(IR) 센서로 눌림을 빠르게 감지하는 광축의 강점을 잘 살렸다. 리니어 방식인 덕분에 걸리는 느낌 없이 낮은 키압으로도 재빠른 입력을 보여준다. 스펙상으로는 40±gf이라고 하는데, K4 옵션 중 가장 낮은 키압이다. 살짝만 눌러도 입력된다고 보면 되겠다.

K2 적축 모델보다는 가볍지만, 그렇다고 종잇장처럼 팔랑이는 느낌은 아니다. 첫 타건은 가벼운데 들어갈수록 묵직하게 눌리는 맛이 더해진다. 조용하면서 손맛까지 좋은 걸 선호한다면 광축 리니어를 고르는 게 현명하겠다.


소음은 적은 편이다. 키캡 딸각거리는 소리만 가볍게 울린다. 애플워치로 측정한 결과 60~63dB을 유지했다. 도서관처럼 고요한 공간에서는 무리가 있으나, 사무실에서 쓰기엔 적당하다.

문득 ‘소리 없이 강하다’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자동차 카피가 떠오르는데, K4 옵티컬 레드를 표현하는 문장으로 이만한 게 없겠다.


K2 편의성에 텐키로 화룡점정

K4에는 K2의 장점이 그대로 살아 있다. 원 버튼 OS 전환, 맥에 최적화한 멀티미디어 키, 유무선 겸용, 대용량 배터리, 공간 활용성, 은근한 조명, 여기에다 텐키의 이점까지 더해졌다.

맥북에 물려 쓰다 윈도 PC로 전환할 때는 측면 버튼을 윈도 쪽으로 밀어주기만 하면 된다. Control, Option, Command 세팅에서 Control, Window, Alt 키 세팅으로 알아서 바뀐다. 윈도용 키캡도 기본 제공되기에, 윈도 전용으로 쓴다면 키캡을 갈아 끼울 수도 있다.


맥용 키보드에서 옮겨놓은 듯한 멀티미디어 키는 키보드 안에서 런치 패드를 부르고, 미션 컨트롤 기능을 쓸 수 있게 해준다. 손이 키보드 밖으로 부산스럽게 움직이지 않도록 돕는다.

대용량 배터리는 충전 스트레스를 덜어준다. RGB 조명을 켜고 써도 10시간 넘는 연속 사용 시간을 보여준다. 대기 시간을 고려하면 꽤 장시간 쓸 수 있다. 근무 시간(하루 8시간 사용) 기준으로 5일에 한 번 충전할 정도다. 잦은 충전 없이 무선의 간결함을 즐길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다.


최대 3개의 디바이스를 물릴 수 있는 점도 만족스럽다. 전환도 쉽다. fn + 1, 2, 3 버튼으로 빠르게 전환할 수 있다. 내 경우 윈도 전용 프로그램 때문에 가끔 윈도 노트북을 켜는데 이때마다 정말 요긴하게 활용했다.

키 매핑(Key Mapping)을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는데, 서드파티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하면 해결된다. 맥에서는 Karabiner를, 윈도에서는 SharpKey를 사용하면 키를 입맛대로 바꿀 수 있다. 맥을 쓴다면 ‘키보드 환경 설정-보조키’ 메뉴에서 caps lock, control, option, command, fn 키 정도는 제한적으로 변경할 수 있다. 참고로 나는 control과 command 입력을 서로 맞바꿔 썼다.


K4는 비쥬얼 측면에서도 칭찬할 만하다. 16가지 은근한 RGB 조명이 분위기를 돋운다. 키보드 두드리는 맛 또한 돋운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조명에 불만인 이들도 물론 있겠지만, 화려한 조명에 피로감을 느끼는 것보단 이쪽이 더 낫다.


여기에 화룡정점을 찍는 것이 바로 텐키. 회계 쪽이나 수를 다루는 직무보단 덜하겠지만, 나름 숫자 입력을 꽤 하는 편이다. 하루가 멀다고 제품 스펙과 가격 정보를 찾아다가 전하고 있으니까. K4는 콤팩트 사이즈로 공간 활용성을 높이면서 텐키까지 누릴 수 있게 해준다. 독보적인 매력이 아닐 수 없다.


2%의 부족함

분명 장점이 많은 매력적인 무선 기계식 키보드다. 하지만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100개에 달하는 키캡이 여백 없이 테트리스 블록처럼 오밀조밀 붙은 탓이다. 화살표와 텐키 영역 또한 여백 없이 다닥다닥 붙었다. 그러다 보니 헛짚는 일이 잦다. 여백이 있다면 손끝 감각으로 화살표 영역인지, 텐키 영역인지 안 보고도 감지했을 터. 그걸 못 하니 화살표 누르려다 자꾸만 숫자키를 누르게 된다. 은근 스트레스다. 물론 1주 정도 지나면 적응되긴 한다.


캡쳐 키가 사라진 것도 아쉽다. 업무를 하다 보면 이런저런 참고 자료를 만들기 위해 캡쳐 기능을 자주 쓸 거다. 맥 OS에선 커맨드 + 쉬프트 + 3 또는 4를 눌러 캡쳐하는데 버튼 하나 누르는 것과 세 개 누르는 건 큰 차이다. 사용도 적은 조명 키는 살아 있고, 사용도 잦은 캡쳐 키가 빠진 것은 다소 이해할 수 없는 설계다. 기능보다 감성이 우선인 걸까.

제보(?)에 따르면 캡쳐 키는 펌웨어 업데이트로 개선되었다. 사용자 피드백을 적극 반영하는 부분은 참 마음에 든다. 1.1 버전으로 올리면 Pgup 버튼을 캡쳐 키로 쓸 수 있다. Fn + p + Pgup 버튼을 눌러 Pgup/캡쳐 기능으로 전환 가능하다. Pgup와 캡쳐를 동시에 쓸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살면서 Pgup 버튼을 몇 번이나 눌러 봤나 생각해 보면 전혀 문제될 게 없겠다.

본체 높이가 상당하다는 것도 은근 불편함을 준다. 받침대까지 펼치면 키보드가 위협적으로 솟아오른다. 높이가 치솟은 만큼 손목에서 느껴지는 불편함도 커진다. 때문에 K2와 마찬가지로 팜레스트를 붙여 쓰는 게 좋다.


100키 풀사이즈로 돌아온 키크론 K4. 이런저런 불편함이 녹아 있다는 점에서 완벽한 무선 기계식 키보드라는 칭호는 다소 무리가 있겠다. 하지만 가격대를 고려하면 충분히 용서할 만한 부분이긴 하다. 만듦새도 훌륭하고 크리티컬한 단점을 찾을 수 없는 키보드라는 것 또한 변함없는 사실이다. 키크론 K2의 퀄리티에 텐키까지 더해졌으니 여부가 있을까.

풀사이즈 키보드와 텐키리스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과 콤팩트함까지 원하는 사람. 아마도 이런 사람들에게 ‘돈 아깝지 않은 만족’을 주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오첩반상의 정갈한 느낌으로.

총점
돈값 하는 키보드
이유혁
도전하는 사람들과 도전적인 아이템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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