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요즘 같은 시대에 ‘문구’만큼 사치재적 취향이 드러나는 장르도 흔치 않다. 강의 내용을 바로 노트북으로 정리하고 직장에서 회의 내용도 스마트폰으로 녹음하는 시대에 말이다. 하루에 펜을 한 번도 안 쓰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고 연필은 대체 언제 손에 쥐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미대 출신은 예외로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구 덕후는 매끈한 만년필에 환호하고 지우개 모양 하나에 집착한다. 오히려 어쩌다 한 번 쓰는 것이기에 ‘기왕 더 예쁜 걸로’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

사실 이 녀석도 그래서 샀다. 여러 가지 소품을 모아서 진열한 편집숍을 둘러보다가 발견했다. 잉크웰(Inkwell: 과거 잉크를 담아 두던 단지 모양의 잉크통)이라는 제목을 보고 ‘레트로 느낌도 나고 예쁘다.’ 하고 지나가려는데 만년필이 아닌 연필과 함께 진열돼있더라. 자세히 보니 샤프너, 연필깎이였다.

DUX Glass Inkwell Sharpener

‘만년필은 전혀 쓰지 않는데 연필은 가끔 쓰니까 실용적이야!’ 라는 생각이 들면 이미 논리를 따질 마음이 없다는 거다. 잉크가 아닌 연필 톱밥을 담는 병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일말의 합리적인(?) 이유로 스스로를 설득하며 지갑을 열었다. 문구는 이래서 무섭다. 만족감 대비 낮은 가격 때문에 명품 백처럼 오래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연필을 1년에 세 번 쓸까 말까 한 내가 연필깎이만 총 3개를 갖게 됐다.

작고 귀여운 유리병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자니 구매의 합리화는 점차 발전한다. ‘이렇게 생긴 연필깎이라니 얼마나 고상하고도 앙큼한지. 만년필에 대해 모르는 사람도 우아한 레트로 감성을 느끼게 해주고 동시에 연필을 깎을 때 쓸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나는 연필깎이를 샀지만 동시에 인테리어 소품도 산 거야. 따지고 보면 오히려 돈을 아낀 셈이지!’

독일산 연필깎이

다행히 예뻐서만 샀다고 핀잔을 들었을 때는 이렇게 받아치면 되겠다. 둑스(DUX)는 1908년에 연필깎이 최초의 공장을 설립해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연필깎이 제조사다. 최상급의 소재의 날을 이용해 정교한 생산공정을 거치기 때문에 내구성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브랜드다. 100년이 넘은 오래된 역사와 높은 품질을 지니고 있다고 하니, 다행이다.

뚜껑에 연필을 넣고 한 번 갈아보는 순간 날에 맞물려 견고하게 깎이는 손맛이 느껴진다. 일반적인 연필깎이는 손에 실리는 힘에 따라 다소 거칠게 깎이거나 밀리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잉크웰 샤프너는 그 차이가 확연히 적다.

톱밥 너마저

다양한 경도의 연필을 모두 깎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경도에 큰 차이 없이 일정하게 깎인다. 연필 톱밥은 병 안에 들어가니 후처리도 깔끔하다. 감성적으로 얘기하자면 병 안에 담긴 연필 톱밥을 보는 게 또 그렇게 예쁘다. 병 안에서 풍기는 나무 냄새가 좋아서 톱밥을 일부러 버리지 않고 보관해 두기로 선택했다(귀찮아서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문구는 다른 수집 장르에 비해서 가격 대비 만족감이 높다. 투박한 디자인 틈에서 나만 특이하고 예쁜 걸 갖고 있다는 묘한 자부심 때문에 문구 수집은 덜 쓰면 덜 쓸수록 오히려 마니아가 늘어난다. 그게 특별해지고픈 사람의 심리니까. 별것도 아닌 것을 별것인 양 바라만 봐도 뿌듯하다면 수집가 반열에 드는 거라는데 나에게는 둑스의 글래스 잉크웰 샤프너가 그 시작이 됐다.

총평

주: 레트로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후회 없을 아이템
객: 연필깎는 기능

서랍 속 대신 책상 위에서 뽐내는 연필깎이
김희정
제품을 쓰고 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