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물건’은 무엇일까? 남자가 쓰는 물건인가, 남자가 쓰는 물건이라면 다 남자의 물건인가?

좀 늦었지만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어도 남자 물건의 기준을 몇 가지 정해보기로 했다. 처음 생각한 기준은 쓰임새가 명확한 것, 두 번째 기준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이 둘은 실제로 물건의 중요한 요소다. 쓰임새는 그 물건의 직접적인 존재 의미다. 물건에 담긴 이야기는 맥락이기도 하고 역사이기도 하며 사람 이야기이기도 한데, 이는 존재 의미를 한층 풍성하게 해준다. 이건 영업 비밀같은 건데, 원고를 만드는 입장에선 이미 있는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분량을 좀 쉽게 먹고 가는 부분도 있어야 한다. (편집장님 미안합니다).

개인적으로 꼽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기준은 많이 비싸지 않은 것이다. 이 역시 엄청나게 모호한 개념이지만 가격을 들었을 때 ‘에이 뭐 그렇게 비싸’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물건을 의도적으로 고르려 한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극한까지 도달한 물건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돈과 시간과 두뇌를 들여 연구를 해서 멋지고 훌륭한 것을 만든 후 비싸게 파는 것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돈 많이 들여서 비싼 걸 만드는 게 예술이라면 ‘단가’에 맞춰서 최대한의, 혹은 적정선의 품질과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도 예술이다. 현명한 남자라면 그 물건 뒤에 들어간 사람들의 관점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적어도 이 페이지에서만큼은 현실적인 제한 속에서 그 제한을 뛰어넘는 가치를 가진 물건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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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길었다. 그래서 떠올린 이번의 남자 물건은 지샥 DW-5600이다.

지-샥은 카시오에서 만든 남자용 디지털 손목시계다. 특유의 성능과 디자인 때문에 1983년 처음 선보인 후 계속 인기를 끌고 있다. 생긴 지 33년이나 되는 만큼 지-샥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시계도 굉장히 많은데, 그 중에서도 이 시계를 고른 이유는 이 시계의 디자인 때문이다. 이 시계의 이름인 DW-5600과 끝을 굴린 직사각형 케이스 디자인은 1987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굳이 비교하면 류현진 선수가 이 시계와 동갑이다.

이 시계의 디자인과 인터페이스는 디지털 손목시계 전반의 표준을 따른다. 시/분/초가 나오는 하단 위로 요일과 날짜가 보인다. 왼쪽 아래의 모드 버튼을 누르면 알람, 타이머, 스톱워치 기능 항목으로 넘어간다. 알람을 끄고 켜는 모든 기능은 오른쪽 위의 버튼으로 진행한다. 오른쪽 아래 버튼은 불 켜는 기능만 한다. 시간을 바꾸거나 알람/타이머 시간을 맞추고 싶으면 왼쪽 위에 움푹 들어가 있는 어드저스트 버튼을 누르면 된다. 버튼 네 개와 기능 네 개. 더없이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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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순한 인터페이스 속에는 손목시계의 긴 전통이 들어 있다. 방금 언급한 기능은 모두 기계식 시계가 구현하려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초기 손목시계는 시간과 분을 보여주는 것에서 출발해 초를 보여주고, 그에 이어 날짜를 알려주거나 경과 시간을 확인하는 기능을 붙였다. 그 모든 기능이 밤에도 보여야 했으므로 어떤 시계는 야광 기능을 붙이기도 했다. 손목시계라는 디바이스의 인터페이스가 이렇게 재해석된 셈이다.

그 인터페이스를 감싼 것이 이제는 아이콘이 된 지-샥의 케이스다. 튼튼한 케이스와 뻔뻔한 자기소개는 지 샥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다. 지-샥은 디지털 무브먼트의 앞뒤로 보호구 역할을 하는 우레탄 부품이 울룩불룩 튀어나와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이 디테일은 시계에 미치는 충격을 막아주는 실질적인 역할을 하는 동시에 시계의 캐릭터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자세히 보면 더욱 그러함을 알 수 있다. 대놓고 이것저것 쓰여 있으니까. 카시오라는 브랜드명보다 크게 쓰여 있는 것이 ‘프로텍션’이고, 그것보다 더 크게 쓰인 것이 ‘지-쇼크’다. 그 위에는 친절하게 쇼크 레지스트라는 설명까지 붙어 있다. 이건 뭐 스포츠카의 본넷 위에 ‘스포츠카’, 문 옆에 ‘빠름’, 트렁크 쪽에는 ‘밟는 대로 튀어나감’이라고 쓰여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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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0시리즈는 많은 후속제품이 나왔다. 사진은 DW5600SG-7. 가격은 $99

 

이런 자랑이 적당히 멋있고 귀여워 보이는 이유는 지-샥이 젊은 시계이기 때문 아닐까. 이 시계는 탄생 배경부터 좀 신나는 구석이 있다. 지-샥의 탄생은 일종의 사내 벤처같은 것이었다. 1981년 카시오의 개발부서 소속 이베 키쿠오는 상품기획자 마츠다 유이치와 니카이도 타카시를 영입해서 ‘프로젝트 팀 터프’를 만든다. 목표는 단순했다. 안 망가지는 시계. 기준도 단순했다. “트리플 텐”

  • 10m 높이에서 떨어져도 멀쩡하고
  • 기본 10기압(통상 수심 100m에 수준에 해당한다)에서 견디는 내충격성
  • 10년 가는 배터리.

이게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는 게 중요하다. 부장님이 아무리 시킨다 해도 이런 건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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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X5600C-1은 클래식버전에 조수 그래프와 달변화 그래픽을 추가했다. 가격은 $99

 

원래 아등바등하면서 해낸 일보다 이렇게 시작한 일이 더 결과가 좋을 때가 많다. 지샥이 딱 그런 경우였다. 지샥의 뒤에는 젊은 재능이 있었고, 그 젊은 재능 뒤에는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번영기일 20세기 후반이라는 풍요롭고 낙관적인 시대의 분위기가 있었다. 그 덕분에 이들은 회사의 어른들과 스위스의 터줏대감들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시계를 바라볼 수 있었다.

지샥의 개발자들이 생각한 시계는 딱 DW-5600같은 것이었다. 거친 환경에서도 잘 작동하는 기계. 카시오가 옛 금형을 계속 활용하는 덕에 우리는 그 시기의 지샥을 아직도 만나볼 수 있다. 코드명도 그때와 똑같은 지샥 DW-5600은 초기의 지샥이 어떤 관점으로 만들어졌는지 볼 수 있는 일종의 사료에 더 가깝다. 가격도 나쁘지 않다. 사람에 따라 기준도 다르겠지만 이 시계는 2015년 3월 현재 6~7만원 선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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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계는 20세기 후반의 디자인 아이콘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일본의 터프가이 지망생들이 만든 이 시계에 세계의 터프가이들이 열광했다. 대표적인 예가 <스피드>에서 이 시계를 차고 달리는 버스에서 곤란한 상황에 놓인 키아누 리브스다. 난생 처음 보는 쿨하고 튼튼한 생김새에 별로 안 비싼 가격까지 갖추었으니 이 시계가 인기를 끌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고전은 안전한 선택이다. 시간보다 냉정한 소비자는 없기 때문이다. 좋은 물건, 누군가에게 필요한 물건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영광과 생명을 이어나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시들기 때문인 건지 남자는 시간이 들어도 꼿꼿하게 가치가 살아 있는 물건을 좋아한다. 지샥처럼, 지샥의 터프한 정신처럼. 지샥을 차는 우리는 평생 이 충격흡수 시계가 받을 충격의 1/100도 못 받고 살 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런 시계를 산다. 200m 방수나 30년의 역사처럼 눈에 보이는 지표로 충동구매라는 불합리를 합리화하면서. 그것도 이 시대의 남자들이 살아가는 방법일 것이다.

 

남자의 물건 시리즈 기사 보기

남자의 물건 – 빅토리녹스 이녹스

남자의 물건 – 후지필름 X-T1

남자의 물건 – 코라빈

남자의 물건 – 보쉬 GML 18 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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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찬용
남성잡지 '루엘'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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