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물건에 감성을 끼얹으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가령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키보드는 어떨까? 매일같이 쓰면서 가끔 손기름 정도 닦아주고, 먼지정도 털어주는 이 입력도구는 누군가의 감성과 취향이 만나면 고급 액세서리로 탈바꿈한다.

하지만 매일 같이 키보드로 글을 남기는 나 같은 에디터에게는 이 감성과 취향을 합리화할 수 있는 ‘분명한 명분’이 있다. 누가 그랬던가 ‘장인은 연장을 탓하지 않지만, 더 좋은 연장이 있다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그러니 매일 같이 마주하는 키보드는 더 나은 결과물을 위해 필요한 중요한 도구고, 여기에 돈을 들이는 건 아주 합리적인 투자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한참을 넋놓고 바라본 빈포크(Vinpok)의 탭텍(Taptek)키보드는 근래에 복잡미묘한 감상을 하게 만든 키보드다. 분명히 좋은 키보드인데, 뭔가 내 취향과는 묘하게 맞지 않는 것 같단 말이지.

빈포크, 탭텍

우선 탭텍 키보드를 내놓은 빈포크부터 이야기를 해보자. 빈포크는 다양한 컴퓨터 주변 액세서리를 내놓은 기업으로, 인디고고와 같은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탭텍 키보드도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인디고고에서 한 번, 마쿠아케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은 제품이다. 사실 작년에 기사가 올라왔을 때부터 눈독을 들이던 키보드다.

사실 국내에선 빈포크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스플릿(Split)이라는 이름의 접이식 모니터 때문이다. 이거야 크라우드 펀딩에서 벌어진 문제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거니 딱히 포장해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탭텍 키보드 소식도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인디고고에서 판매 소식은 놓치고 뒤늦게 마쿠아케의 도움을 받았다.

가장 작은 맥용 기계식 키보드라는 것

사실 맥os를 쓰는 사람에게 요새 유행하는 기계식 키보드를 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상당수의 키보드가 윈도우용 키보드를 내놓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키보드를 전혀 쓸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완벽한 대체는 없듯이 맥 네이티브 키보드와 윈도우 네이티브는 경험이 다르다. 특수 키의 작은 차이, 키캡의 교체 등 섬세하게 신경을 써야 할 일이 많았다.

이해한다. 하드웨어 회사에서도 시장이 큰 윈도우 이용자를 생각해야지. 맥os를 쓰는 사람이 도달하는 키보드는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최고급 키보드다. 특히 하드웨어 키가 완전히 다른 방식인 정전용량무접점 방식을 쓰는 해피해킹 추천이 높다.

그래도 최근엔 꽤 다양한 선택지를 구경했다. 맥용 기계식 키보드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키보드가 소개됐고, 얼리어답터에서 리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키보드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왜냐면 난 지조있는 취향의 노동자니까

박세환 에디터가 신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걸 보았지만, 큰 관심이 없었다. 비싼척 하는 게 아니라 내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키가 많고, 키보드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었다. 매직키보드로 시작한 작은 키보드 사랑은 내 어깨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넘버패드까지 있는 103, 106키는 마우스와의 거리가 자연스레 멀어져 쓰다보면 어깨와 손목에 무리가 온다.

내가 하루이틀 글 쓸 것도 아니고, 오래오래 쓰려면 몸을 소중히 해야지. 괜히 손목받침대도 두고, 마우스도 바꿔가는 게 아니다. 다만, 이 작은 키보드 사랑은 좀 극단적이라 어지간한 크기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그래서 87키의 텐키리스인 키크론 K1(Keychron K1)은 불합격. 게다가 맥OS에서 홈, 엔드, 페이지 업·다운은 커맨드(CMD)와 방향키로 충분히 쓸 수 있다.

그래서 빈포크 탭텍의 78키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방향키마저 단축키를 이용해야 하는 해피해킹은 너무 많이 벗어났고, 이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찬찬히 박세환 에디터의 리뷰를 보았는데, 이거 이상하다. 묘하게 닮았는데?

이거 묘하게 닮았는데?

보다 보니 이거 묘하게 닮았다. 7.6mm에 불과하다는 키 높이, 그리고 자체 개발했다는 청축. 키캡을 열어보니 스위치 모양까지 닮았다. 유선과 블루투스를 넘나드는 방식이나 듀얼 OS지원도 닮았다. 심지어 그제야 박세환 에디터에게 키보드를 빌려 타건해봤는데, 타건감도 비슷한 느낌이다. 현란한 LED마저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좀 더 고급스러운 느낌이 든달까? 미안하지만, 내 쪽이 좀 더 뛰어난 만듦새를 갖춘 것 같다.

키크론 K1 리뷰에서 청축치고 얕은 키감을 단점으로 삼았지만, 적축, 무소음 적축, 정전용량무접점 키보드를 섞어쓰고 새로 나온 나비식 키보드를 끼얹은 내게는 오히려 청축 특유의 반발력이 부담스러웠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로, 키를 누르다 보면 피로감을 쉬이 느낀다.

오히려 키감 쪽에서 아쉬운 부분은 스위치의 입력 방향. 키 스트로크를 위에서 누를 때는 커스터마이징된 청축의 경쾌한 느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지만, 살짝 사선에서 입력이 들어가면 뻑뻑한 느낌이 든다. 그나마 일주일 동안 정신없이 타건하다 보니 조금은 부드러워진 느낌이지만, 아직도 조금씩 빡빡한 압력이 손끝에서 느껴지면 버겁다.

여기에 키캡이 묘하게 미끄러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정방향이 아닌 약간 빗겨간 방향으로 자꾸 키보드를 누르게 된다. 윤활을 한 번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일이 너무나 커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키 하나하나의 크기도 큼직하고, 키 트래블도 나쁘지 않다. 자잘하게 짤깍거리는 스위치 소리는 청축치고는 그래도 조용하다 할 만 하지만, 관대한 회사를 다니거나 회사에서 영향력있는 사람이 선택하길 바란다.

예뻐서 힐링된다….

오른쪽 끝에 있는 인디케이터 버튼의 위치마처 키크론과 닮았다. 그러나 탭텍은 특수키가 없으니 백스페이스 위에 바로 인디케이터 버튼이 있다. 가끔 습관적으로 글씨를 지우다가 인디케이터 버튼을 누르고, 그러면 참… 예쁘다. 기분이 풀어지고 마음이 정화된다.

글이 풀리지 않으면 잠시 인디케이터 버튼을 몇 번 눌러 반짝거리는 키보드를 본다. 그 옛날옛적 매직홀 플립폰처럼, 자꾸만 빠져드는 뭔가가 있다. 불멍, 아니 LED멍이다. 회사에서 잠시나마 힐링할 수 있는 시간. 이쯤되면 키보드를 업무용이 아니라 힐링용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키보드를 착착 누르는 데서 오는 묘한 쾌감도 있고.

하지만 아쉬운 키배열

지조있는 취향의 노동자로서 쓴 소리를 하나 하자면 키 배열이 아쉽다. 첫 번째는 펑션(fn)키. 키보드 가장 좌측 하단에 있는데, 평소에 잘 쓰는 키가 아니라 스페이스 바 기준 오른쪽으로 옮겨갔으면 좋았을 것 같다. 특히 맥os가 아니라 윈도우용으로 탭텍을 받아봤다면 윈도우가 얼마나 Ctrl을 활용한 단축키가 많은지 깨달으면서 눈물을 훔칠 것이다.

스페이스 바 오른쪽에 컨트롤(control) 대신 옵션(option, alt) 키가 들어간 것도 조금 놀라운데, 맥os에서도 윈도우에서도 오른쪽 알트를 누를 일이 거의 없다. 맥os에서는 그냥 노는 키가 돼버렸고, 윈도우에서는 키맵핑을 통해 한자 키로 쓰고 있다. 하지만 이것까지는 맥북의 키보드가 그러니…하고 관대하게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적응이 안 되는 게 오른쪽 시프트(shift) 키다. 기사에서도 미처 보지 못했는데, 누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키를 달아놓은 걸까. 오른손 새끼 손가락으로 시프트 키를 많이 누르는 타자 습관 때문에 매번 시프트 키를 누를 때마다 오타가 난다. 게다가 오입력하는 키가 묘하게 무서운 키다. 위 방향키인 것.

그러니 윗 줄에 다른 글자가 들어가면 그나마 다행. 최악의 상황은 쉬프트와 위 방향키를 동시에 눌러 한 줄을 드래그해버리고, 그 위를 다른 글씨로 덮어버리는 거다. 별 생각 없이 키보드를 두두두두 누르다 보면 ‘도대체 이 글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싶은 글이 나온다. 이게 뭐람 진짜.

아직도 맥OS에서 커맨드 스페이스로 한/영 전환을 하는데, 오랜 키보드 습관을 키보드 형태 때문에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뜻밖이었던 건 오른쪽 시프트를 쓰는 사람이 생각보다 없었다는 건데….

괜찮긴 한데, 너도 내게 끝사랑은 아니야…

괜찮다. 스위치의 타건감은 결국 취향 문제긴 하지만, 이만하면 ‘기계식’하면 생각날 만한 클릭감이다. 키 스트로크도 적당하다. 취향과 조금 안 맞는 부분은 있었지만, 맥OS 네이티브로 나온 기계식 키보드. 그 중에서도 80키 이하의 미니 타입은 찾기 어려웠기에 탭텍 키보드로 다시 한번 타건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내게 완전히 맞진 않았다. 키배열에 편중된 부분이라 어떻게 수정할 여지조차 없다는 게 슬플 따름이다. 장인은 연장을 탓하는 법이 아니라지만, 이왕이면 괜찮은 연장이었으면 하는 게 장인이 아닐까…. 그래서 가끔 기분전환을 위해 고이 모셔두고, 좀 더 내게 맞는 연장을 찾아보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맥OS용으로 좋은 키보드 추천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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