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우드 펀딩은 믿고 거른다.’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어느 정도는 동감한다. 다수의 실패 사례로 판단했을 때 신뢰보단 불신이 앞서는 게 사실이니까. 크라우드 펀딩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건 아니다. 여전히 스타트업의 재치 넘치는 아이디어 제품을 응원하는 입장이다. 한편으론 무릎을 탁! 칠 만한 명작(名作)이 한 번쯤 터져 나올 거란 믿음도 갖고 있다.

페나(PENNA) 키보드는 그런 기대를 품고 참여한 펀딩이었다. 레트로 디자인의 기계식 키보드. 페나는 외국 크라우드 펀딩에서 이미 큰 성공을 거뒀다. 인디고고에서만 약 12억원을 모았다. 킥스타터에서 거둬들인 약 5억원을 더하면 모금액이 무려 17억원에 달한다. 국내에서 진행한 크라우드 펀딩도 대박이 났다. 앙코르에 앙코르를 거듭한 펀딩은 최근 4차까지 진행됐다.

성공적인 펀딩에 목말라 있던 나는 페나의 성공담에 취해 펀딩 막차에 발을 올렸다. 이번에는 만족스러운 녀석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레트로(Retro)의 매력

누가 봐도 멋진 디자인이다.

디자인 하나로 압도하는 키보드였다. 누가 봐도 멋진 디자인이다. 오래된 타자기를 연상하게 하는 레트로 스타일이 인상적이었다. 1㎏의 묵직함은 타자기 느낌을 더욱 살려줬다. 레트로 디자인에 기계식 키보드 특유의 타자 소리가 더해지니 실제 타자기를 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뭔가 자꾸만 쓰고 싶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첫인상이었지만, 꼼꼼히 뜯어보니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긴 했다. 사소한 곳곳에서 미숙함이 드러났다. LED 인디케이터 부분은 덮개 없이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PCB 기판이 보일 정도인데, 프로토타입을 쓰는 듯한 느낌을 줬다. 인디케이터의 위치도 모호해서 앉은 상태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몸을 앞으로 쭉 빼고 위에서 쳐다봐야 했다.

매크로 바의 완성도도 떨어졌다. 이 바는 ‘위로 올려 문장을 저장하고, 아래로 내려 저장한 문장을 자동 입력’하는 식으로 쓴다. 그런데 탄성이 아주 좋은 탓(?)인지 툭 내려치면 맨 위로 튕겨 올라왔다. 이러면 매크로 ‘입력’ 모드로 전환된다. 입력 모드로 바뀐지도 모르고 타자를 치다보면 저장해 놓았던 문장이 모두 초기화되어 버린다.

뒷모습이 아름답지 못한 그.

건전지 삽입구도 문제였다. 건전지를 단단하게 붙잡아 주는 장치가 없었다. 무심결에 삽입구 덮개를 열면 건전지가 툭툭 떨어져 버린다. 미끄럼 방지용 고무도 심각했다. 무슨 소재로 만든 건지 바닥에 시꺼멓게 묻어났다. 페나가 지나간 자리가 쉽게 더러워졌다. 뒷모습이 아름답지 못한 녀석…

쫀득한 키감. 오타는 덤?

페나의 적축. 쫀득한 맛이 일품이다.

다행히도 키감은 뛰어났다. 체리 스위치의 탁월한 키감을 맛볼 수 있었다. 적축 특유의 쫀득한 손맛이 살아 있었다. 소음도 적은 편이어서 사무실에서 사용하기도 부담 없었다. 물론 여타 적축 제품과 비교했을 때 소음이 조금 있긴 하다.

아! 이놈의 오타.

키감이 좋다고는 하나 타자하기 쉬운 키보드는 아니었다. 키캡이 조그맣고, 키캡 간 거리가 먼 탓이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치지 않으면 오타가 제법 났다. 기존 적축 키보드 쓰듯이 누른 듯, 안 누른 듯 가볍게 쳤다가는 오타로 도배되기 일쑤였다. 적축과 크롬 키캡, 타자기 스타일의 궁합이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페나 키보드는 청축, 적축, 두 가지 스위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키캡도 작고 동그란 크롬형, 사각형에 모서리가 부드럽게 깎인 다이아몬드형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면적이 넓은 다이아몬드 키캡과 타건감이 확실한 청축 모델을 선택할 걸 싶었다.

뉴트로(New-tro)의 정석

타자기와 아이폰의 조화. 보아라. 이것이 뉴트로다.

뉴트로(New-tro)를 대표할 만한 키보드였다. 복고풍 타자기에 최신 기술을 잘 녹여 냈다. 페나 키보드는 멀티페어링을 지원한다. FN + B키를 눌러 블루투스 페어링 모드로 진입한 후, F1~F5키에 최대 5대까지 기기를 등록할 수 있었다. FN + 기능키(Function Key) 조합으로 손쉽게 기기를 전환할 수 있어, 여러 기기에서 사용하기 좋았다.

지원하는 운영 체제도 폭넓었다. 윈도10, 맥 OS, iOS, 안드로이드 모두 지원했다. ‘매크로’라는 흥미로운 기능도 갖췄다. 매크로 바에 ‘엔터’를 저장해 놓으면, 실제 타자기처럼 엔터키 대용으로 쓸 수도 있다. 완성도가 뛰어나지 않아 자주 사용하지 않았지만, 가끔 유용하게 쓰였다. 실제 타자기 쓰는 것처럼 폼 잡는 데도 좋았고…

기기와는 블루투스 4.2로 연결됐다. 연결법은 사용자에 따라 어려움을 느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기기를 연결하고, 전환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애먹은 이들이 많은 듯했다. 와디즈 펀딩 페이지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상당했다. 블루투스 연결이 원활하지 않다는 사람도 꽤 있었다.

매력적인 키보드이긴 하지만…

이렇게 보면 참 멋스러운데…

페나 키보드의 디자인은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체리 스위치의 키감도 일품이다. 하지만 페나는 디자인과 키감만으로 만족하기엔 아쉬움이 많은 키보드였다.

앞서 언급했듯 완성도가 떨어지는 부분이 산재했다. 적축 + 크롬 키캡 조합은 오타 발생률이 높았다. 적축 키보드에서 할 수 있다는 구름 타법? 꿈도 못 꿨다. 거치대가 너무 깊어 태블릿의 홈 버튼을 가리기도 했다. 매크로 바의 완성도 또한 떨어졌으며, 들리는 바로는 블루투스 연결이 엉키는 일도 생긴단다. 한/영 전환도 느리고 한두 번씩 먹통이 되곤 했는데, 타자하는 동안 인내심의 한계를 여러 번 느꼈다.

모금액과 펀딩률은 품질의 바로미터?

4차 펀딩에서도 1973% 펀딩률을 기록한 페나.

페나 키보드는 인디고고와 킥스타터에서 대성공을 거뒀고, 와디즈에서도 수억 원의 자금을 모은 제품이다. 그런데 기대를 너무 많이 했던 탓일까? 막상 사용해 보니 만족감보다는 실망감이 더 컸다. 물론 페나가 망작(亡作)이라는 건 아니다. ‘디자인’과 ‘키감’에 가치를 둔다면 자잘한 단점은 참고 쓸 만하다. 나름대로 준수한 키보드다. 전체적인 완성도에 가치를 둔다면… 글쎄다. 크게 실망할 수 있다.

페나는 수억 원의 펀딩 모금액, 수천 퍼센트의 펀딩률이 제품의 완성도까지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잘 보여줬다. 수치에 현혹되지 말고, 제품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해줬다. 페나의 펀딩은 4차 앙코르까지 진행되었기 때문에 참고할 만한 데이터, 후기가 많았다. 후기를 읽고 어떤 게 문제인지 미리 알았더라면, 제품에 기대를 걸지 않았을 테고, 크게 실망할 일도 없었을 거다. 아니, 펀딩에 참여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사실 페나 키보드의 자잘한 문제는 이번에만 지적된 게 아니었다. 완성도 이야기는 외국 크라우드 펀딩 때부터 언급된 문제였다. 페나가 크라우드 펀딩에 처음 등장한 시기가 지난해 봄이다. 그동안 개선하려는 성의를 조금만 더 보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마감과 완성도에 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영문 키캡에 한글 각인만 새겨 국내에 내놓은 게 못내 아쉽다.

이번 펀딩도 실패했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아쉬움이 클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