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혜성 같았다.”

페블을 표현하는 수식어로 이보다 적합한 건 없을 듯하다. 스마트워치의 아버지 격이었던 페블은 말 그대로 혜성처럼 나타나 혜성같이 사라졌다. 반짝 떠올랐다 추락한 브랜드는 페블 말고도 많다. 그런데도 페블이 기억 속에 오래 남는 이유는 그만큼 강렬한 유산을 남겼기 때문이다.

혜성 같은 등장

페블 1세대. 지금은 볼품없지만, 2013년에는 혁신적인 스마트워치였다. @kickstarter.com

적지 않은 사람이 스마트워치 시장을 이끈 퍼스트무버로 애플이나 삼성을 떠올리곤 한다. 그런데 이 시장을 열어젖힌 건 애플도, 삼성도 아니다. 페블 테크놀로지(Pebble Technology, 이하 페블테크)라는 스타트업이다. 실리콘밸리의 이 작은 기업에서 전 세계를 휩쓴 스마트워치 열풍이 시작됐다.

지난 2012년, 에릭 미기코브스키(Eric Migicovsky) 前 페블테크 CEO는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의 품속에서 페블(Pebble)을 개발했다. 페블은 전자종이(e-Paper) 중 하나인 흑백 메모리 LCD를 넣은 스마트워치, iOS·안드로이드 OS와 연동되어 간단한 알림을 보내주는 시계였다. 자체 OS(페블 OS)까지 갖춘 신선한 제품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페블은 투자자들의 마음을 열지 못했다.

기록적인 크라우드 펀딩 모금액이었다. @kickstarter.com

에릭 CEO는 투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자 비책을 꺼내 들었다. 크라우드 펀딩이었다. 당시 웨어러블 시장은 달아오르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언론에선 연일 ‘포스트 스마트폰’이라며 스마트워치를 언급했다. 새로운 기기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오른 가운데, 페블이 킥스타터에 등장했고 사람들은 열광했다. 결국, 킥스타터에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잭폿이 터졌다. 페블은 모금액 약 1,000만달러(약 113억원)를 돌파하며 그 자체로 크라우드 펀딩의 신화가 되었다.

크라우드 펀딩의 신화

페블 타임으로 또 한 번 킥스타터를 뒤흔들었다. @kickstarter.com

페블의 성공은 스마트워치 시장이 활짝 열린 계기가 되었다. 이후 유수의 IT 기업이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유려한 디자인과 뛰어난 성능으로 무장한 스마트워치가 쏟아진 가운데, 페블은 특유의 단순함을 유지했다. 페블만의 수수한 디자인, 간단한 기능을 원하는 소비자 덕에 판매량은 꾸준히 상승했다. 후속작도 꾸준히 내놨고 반응 역시 좋았다. 2015년 크라우드 펀딩에 올린 페블 타임은 약 2,000만달러(약 227억원)를 끌어모으며 페블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단순함 외에도 페블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요소가 있다. 가격과 배터리 지속 시간이다. 페블은 99달러(약 11만원), 페블 타임은 149달러(약 17만원)였다. 40만원을 호가하는 플래그십 제품의 절반 값이다. 저전력 전자종이 디스플레이 덕분에 배터리도 오래갔다. 한 번 충전으로 5~7일은 너끈히 버텼다. 당시만 해도 시간도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끝내 시장에 나오지 못한 페블 타임2(우), 페블 코어(중앙). @kickstarter.com

2016년, 페블테크는 기세를 몰아 페블 타임2도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다. 모금은 가뿐하게 성공했다. 타임2는 그해 말 배송 예정이었고, 모두가 새 페블을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변이 발생했다. 페블테크가 자금난으로 휘청이기 시작한 것. 그렇게 연말이 다가왔고, 안타깝게도 타임2는 시장에 나오지 못했다.

변화 없는 전략, 정해진 운명

2016년 말, 페블테크가 핏비트(fitbit)에 인수합병되면서 모든 개발이 중단됐다. 당시 핏비트는 2018년까지만 페블 서버를 유지하겠으며, 더 이상의 페블은 없다고 단언했다. 페블테크의 인수합병 소식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안겼다. 장밋빛 미래가 기대되던 스타트업이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페블테크의 실패 요인을 분석하는 기사도 적잖게 쏟아졌다. 여러 의견이 분분했지만, 여기엔 꽤 복잡한 요인이 뒤섞여 있다.

– 웨어러블의 불씨가 꺼졌다

웨어러블, 스마트워치 시장은 정말 빠르게 달아올랐다 빠르게 식어버렸다. 2015년 이후엔 많은 기업이 사업을 접고 시장을 떠났다. 2012년만 해도 스마트워치가 일상 속 많은 것을 바꿔줄 거란 기대가 있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달랐다. 조그마한 스마트워치가 스마트폰을 대체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소리였다. 피트니스 트래킹, 심박 수 체크, 스마트폰 알림과 시간 확인 정도가 주된 용도였다. 고가의 기기인데도 활용성이 낮다는 이유로 소비자들이 등을 돌렸다. 시장은 반 토막이 났다.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2016년 3분기 전 세계 스마트워치 출하량은 270만 대를 기록했다. 2015년 같은 분기 출하량이 560만 대였으니 절반 넘게 줄어든 것이다. 시장의 거품이 꺼지며 페블테크는 동력을 잃어버렸다.

– 새로운 강자가 등장했다

샤오미의 등장은 페블테크만큼이나 강렬했다. 2014년, 샤오미가 가성비를 앞세우며 웨어러블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들의 무기는 79위안(약 1만3천원)짜리 피트니스 밴드, 미밴드였다.

웨어러블 시장을 재편한 샤오미 미밴드2(좌), 애플 애플워치1(우). @namu.wiki

2016년에는 시계 기능까지 넣은 미밴드2를 출시했다. 가격은 고작 149위안. 3만원도 안 되는 값이다. 샤오미 미밴드2는 심플한 디자인, 간단한 기능을 콘셉트로 삼은 페블과 포지션이 비슷했다. 값은 비교 불가능한 수준으로 낮았다. 페블의 자리를 위협하기 충분했다. iOS와의 연동성,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무기로 한 애플워치도 위협적이었다. 애플은 애플워치 출시와 함께 시장 1위로 등극했다. 웨어러블, 스마트워치 시장이 고가의 애플과 저가의 샤오미로 양분되면서 페블 같은 중저가 브랜드는 설 자리를 잃기 시작했다.

–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페블테크는 중저가, 오래가는 배터리만으로는 추가 수요를 발생시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판매량은 자연스럽게 줄었다. IDC는 페블테크의 2016년 3분기 스마트워치 출하량이 약 10만 대라고 밝혔다. 2015년 같은 분기와 비교해 절반 아래로 감소한 수준이었다. 페블테크는 킥스타터에서 재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크라우드 펀딩이 구세주가 되어주진 못했다. 펀딩이 성공했다고는 하나 캐피털 상환금을 갚는 데 많은 돈이 들어갔다. 위기는 그해 연말까지 이어졌다. 결국 페블테크는 모호해진 포지션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말았다.

혜성처럼 등장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페블테크. 스마트워치 산업의 선구자였던 이 기업은 그렇게 웨어러블 역사에 한 획을 그어버리곤 다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강렬하게 남은 페블의 유산

페블 타임2. 크라우드 펀딩은 성공했지만, 회사를 구해주지는 못했다. @kickstarter.com

페블은 사라졌지만, 이들이 후대에 남긴 교훈은 명확하다. 크라우드 펀딩에만 의존한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거다. 페블의 누적 판매량은 2015년 기준 100만대였다. 적지 않은 양이었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많은 자금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런데 페블테크는 페블 타임2, 페블 코어 역시 크라우드 펀딩으로 팔았다. 일각에선 ‘또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할 만큼 회사가 어렵냐’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페블 테크는 성장 동력을 크라우드 펀딩에서만 찾았다. 2016년은 애플과 샤오미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시장에 진입한 때다.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거나, 앱 생태계를 강화하거나, 단점으로 지적된 피트니스 트래킹 성능을 높이는 등 제품 속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할 상황이었다. 애플워치와 경쟁할 수 없다면, 기능을 줄이고 가격을 대폭 낮춘 보급형 페블로 시장을 노려보는 것도 현명한 전략이 될 수 있었다.

페블테크는 위기의 상황에서 과감하고 전략적인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안정적인 판매 루트를 구축하는 데도 소홀했다. 그런 채로 또다시 킥스타터의 문을 두드렸다. 만약 그게 이들이 찾은 전략이었다면, 어차피 페블테크는 사라질 운명이나 다름없었다.

우리의 마음을 훔쳤던 페블워치 2종

고가의 애플과 저가의 샤오미 틈새에서 매력 발산을 하지 못했을 뿐. 페블은 기본기 하나만큼은 탄탄하게 갖춘 제품이었다. 마니아들에게는 여전히 사랑받는 페블. 특유의 매력으로 많은 이의 마음을 훔쳤던 제품 2종을 모아봤다.

@kickstarter.com

– 페블 타임(Pebble Time) & 타임 스틸(Time Steel)

크라우드 펀딩 모금액 2,000만 달러를 기록한 전설적인 스마트 워치다. 1세대 페블과 성능은 비슷하다. 좌·우 버튼을 이용한 조작법도 같다. 달라진 건 디스플레이다. 타임 모델엔 컬러가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배터리 지속 시간은 7일을 유지했다. 디자인은 현재의 애플워치와 유사한 형태로 바뀌었다. 전체적으로 세련되면서도 귀여운 느낌을 주는 디자인이다.

@kickstarter.com

페블 타임 스틸은 플라스틱을 버리고 스틸로 마감한 제품이다. 기존의 장난감 같은 느낌은 온데간데없고 세련된 느낌을 선사한다. 타임보다 배터리가 3일 더 지속된다는 게 강점. 페블의 매력을 경험해 보고 싶다면 이 두 모델을 사용해 보길 추천한다. 물론 공식 판매 루트로는 구할 수 없다. 몇몇 해외 쇼핑몰 또는 중고품 커뮤니티에서 구매해야 한다.

참고로 사후 지원은 받을 수 없지만, 제품을 쓰는 데 치명적인 문제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핏비트가 2018년 6월 30일부로 페블 지원을 종료한다고 밝히자 이용자들은 자체 서버를 구축했다. 공식 서버 대신 레블(Rebble) 서버를 사용하면 페블을 정상적으로 쓸 수 있다. 이용자들이 만든 서드파티 OS, 레블(Rebble) OS라는 것도 있다. 페블을 놓지 못하는 이용자들의 노력이 참으로 눈물겹다.

@fitbit.com/kr

– 핏비트 버사(fitbit Versa)

페블은 아니지만, 페블의 맛을 느껴보고 싶다면 핏비트 버사가 대안이다. 핏비트가 페블테크 인수 후 내놓은 스마트워치다. 버사는 디자인부터 페블이 떠오른다. 좌·우측에 달린 버튼만 봐도 영락없는 페블이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제품으로 보는 게 맞다. 버사는 핏비트의 피트니스 밴드에 페블 스마트워치 기능을 살짝 얹은 느낌을 준다. 그만큼 피트니스 기능에 더욱 초점을 맞췄다. 외관도 페블보다 고급스럽다. 여러모로 ‘페블이 이런 방향으로 변화를 추구했다면 어땠을까?’란 생각이 들게 하는 제품이다.

기억하자. 크라우드 펀딩에 의존한 기업의 처참한 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