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I also…

내가 애플의 프레젠테이션에서 기억하는 장면 대부분은 스티브 잡스의 모습이다. 청바지 주머니에서 꺼냈던 아이팟, 서류 봉투에서 꺼냈던 맥북 에어, 대망의 아이폰… 그리고 또 하나는 팀 쿡이 하얀색 스트랩의 애플워치를 손목에 차고 두 팔을 추켜올리며 위풍당당 걸어 나오던 때다. 당시에는 이런 생각을 했다. 삼성보다 훨씬 늦게 출시하는 주제에 뭐가 저렇게 당당하지? 특별한 기능도 안 보이는데. 그땐 몰랐다. 팀 쿡의 자신감 넘치던 그 미소는 나를 애플의 늪에 곧 빠뜨려 버릴 거라는 사악한 표정이었음을. 애플워치는 스마트워치가 아니라, 앱등이 전용 수갑과도 같은 족쇄였다는 걸…

 

애플워치와의 첫 번째 동거, 그리고 이별

벌써 3년 전인가. 리뷰를 위해 1세대 애플워치 스테인리스 모델을 들였었다. 다행히도(?) 회삿돈으로. 67만원이라는 무서운 가격의 손목시계. 사회 초년생을 위한 웬만한 브랜드 시계보다 더 비싸다. 며칠 사용해보고 난 후 느꼈던 점은 오로지 디자인이 예쁘다는 것뿐이었다. 애플 특유의 이미지가 느껴지는 심플한 외관. 코팅한 조약돌처럼 반짝이는 모서리. 어딘가 투박했던 당시의 스마트워치들과는 확실히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다만, 그뿐. 내 심박수를 재서 어디에 쓰나? 데이터 쌓아두고 감상할 것도 아니고. 카톡 알림을 시계로 받아서 무엇 하나? 어차피 스마트폰으로 답장할 건데. 앱을 실행하면 로딩도 너무 길고, 배터리는 또 왜 그렇게 빨리 닳는지. 단 하루만 충전을 깜박해도 다음 날에는 쓸모없어지는 기계 덩어리일 뿐. 있어도 나쁠 건 없지만, 없어도 그만인 시계. 시계를 닮은 시계, 시계가 아닌 시계.

결국은 리뷰 후에 다시 되파는 거로 정리되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애플워치에 제대로 몰입하지 못했던 이유가 그거였을 수도 있다. 내 것이 아니니까. 어쨌든 그 당시 애플워치에 대한 나의 결론은, ‘선물 받으면 생각 없이 차고 다니긴 좋겠으나 굳이 내 돈 주고 사진 않을 물건’이었다.

  • 임팩트 : 내 손목에 멋스럽게 반짝이는 애플워치, 내가 애플이고 애플이 곧 나다.
  • 방출 이유 : 손목에서 뭔가 멋진 걸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기대가 커도 너무 컸다. 

 

애플워치와의 재회, 또다시 이별

‘자니?’

방출했던 애플워치는 새 주인의 손목에서 안락하게 잘 지내고 있겠지? 나는 원래 걸리적거리는 게 싫어서 손목시계를 아예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며칠 같이 있었다고 금세 정이라도 든 걸까. 손목도 마음도 허전하다.

그런데 방출한 지 2년이 지난 어느 날, 1세대 애플워치 스포츠 38mm 모델을 15만원이라는 가격에 중고로운 평화나라에서 샀다. 살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무언가에 홀린 듯 그냥 샀다. 멍하니 인터넷을 뒤적이다 가격에 혹했다. 그야말로 그냥 충동 구매. 미개봉 신품이 30만원대였던 걸 생각하면 굴리면서 쓰기에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애플워치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이번엔 애정이 담겨서였을까? 헤어졌을 때 별다른 미련도 없었지만, 다시 보니까 전엔 알지 못했던 모습들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초창기와 좀 달라진 WatchOS 업데이트의 영향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수줍은 듯 손목을 두드리던 알림들이 이메일, 일정, 아이디어를 리마인드 해주는 것도 산뜻했고, 산책하다 보면 활동 링을 마저 채워보라는 격려 멘트도 운동 욕구를 높여줬다. 시간마다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라고 재촉도 하고, 스트레스가 풀릴 거라며 심호흡도 권유한다. 귀엽다. 줄질도 해보려고 하나에 5~7천원 하는 중국발 정품st 밀레니즈 루프 스트랩과 각종 우븐 스트랩을 사들여 이리저리 바꿔 끼우며 차고 다녔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손목에서 빛나는 존재감은 나를 뿌듯하게 했다.

 

잘 가(가지 마) 행복해(떠나지 마)

하지만 애플워치는 나에게 일방적인 통보만 해줄 뿐 내가 다가가는 걸 받아주기엔 많은 준비가 필요해 보였다. 뭔가 해보려면 속도가 너무 느려서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날씨라도 확인하려면 수 초의 구동 시간 동안 인내심을 가져야 했다. 블루투스로 연결된 이어폰을 제어하는 리모컨으로서의 활용도 사실상 어려웠다. 로딩되고 있는 시간에 아이폰을 꺼내서 제어하는 게 훨씬 나을 지경이고 그마저도 먹통이 되기 일쑤였으니.

배터리도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충전 강박증이 있는 내게, 일과를 마친 후에 마주하는 30~40% 잔량의 배터리는 증세를 더 악화시켰다. 딱히 작업이랄 것도 없고 단지 20~30차례의 알림만 받았는데도. 하루라도 충전을 하지 않으면 다음 날에는 쓸 수가 없다. 엄밀히 말해 전원 절약 모드로 시간만 확인할 수는 있지만, 그건 애플워치라는 이름이 무색해지는 듯한 엉성한 조치에 불과했다.

그런 고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새 애플워치에 눈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더 빠르고 배터리도 오래 가는 새 애플워치. 결국 며칠 후 1세대 애플워치와의 연을 끝냈다. 10만원에 방출하고 30만원에 시리즈 3를 중고로 들였다. 어느새 이별의 미련도 새로운 만남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며, 애플이 만든 손목시계에 놀아나고 있는 나의 모습……

  • 임팩트 : 저렴한 가격에 애플이 만든 시계로 시간을 볼 수 있게 되어 감격.
  • 방출 이유 : 느려 터진 속도와 하루살이 배터리는 도저히 못 참겠다. 

 

우여곡절 끝에 나의 손목에 둘린 애플워치 시리즈 3

반갑다 시리즈 3!

애플워치 시리즈 3를 들이고 나서 가장 만족한 부분은 퍼포먼스다. 1세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빠릿한 동작으로 뭐든 척척 보여준다. 그다음은 배터리다. 20~30건의 알림 확인과 함께, 출∙퇴근 시에 블루투스 이어폰의 리모컨으로 활용하면서도 밤 9시쯤 귀가하면 75% 내외의 든든한 배터리 잔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간혹 10분이 넘게 걷고 있으면 운동을 하는 거로 인지해 자동으로 운동량 측정 모드로 돌입하기도 해서 편리하다. 

 

시계 이상의 특별한 그 무언가

애플워치의 가장 큰 특징은 오지랖이 넓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손목을 두드리면서 알림 왔다, 일어나라, 휴일에 누워서 퍼져 있기라도 하면 어제에 비해 안 움직이는 것 같다, 일어나서 몸을 움직여봐라, 집중력에 좋은 심호흡도 해봐라… 잔소리도 그런 잔소리가 없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잊을만하면 톡톡, 나를 환기하며 건강을 챙겨준다는 느낌이 더 크다. 아유 그래, 알았다 알았어, 몸 좀 풀자!(흐뭇)

 

운동과는 거리가 30마일 정도 떨어진 내 마음이 애플워치 덕에 달궈지는 순간도 자주 찾아온다. 3개의 원으로 이뤄진 활동 모니터 그래프를 완성하라는 알림이 뜨면, 묘하게 채우고 싶어지는 욕구가 끓어오른다. 완성하는 순간 불꽃으로 화려하게 타오르는 그래픽을 보는 재미도 있고, 간혹 일정 미션을 완료하면 배지도 주는데 그걸 모으는 재미도 은근히 쏠쏠하다. 확실히 애플워치는 단순 손목시계나 시크한 스마트워치라는 존재를 벗어나고 싶어 하듯, 액티브 활동의 제안이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재밌다.

 

시계의 본질에 아직은 1% 부족한 그 무엇

손목시계를 착용하는 목적은 디자인 포인트와 시간 확인의 2가지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애플워치는 디자인 하나만큼은 참 예쁘지만, 손목시계로서의 본질에 다가가기에는 뭔가 미묘하게 부족하다. 배터리를 자주 충전해야 하는 점도 그렇긴 하나 가장 큰 단점은 디스플레이가 항상 표시되지 않는다는 것(AOD 부재)이 아닐까. 시간을 확인하려면 손목을 들어 올리거나 화면을 톡 터치하거나 용두를 돌려야 한다는 거다. 그 작은 행동 하나가 단순히 귀찮아서가 아니라, 어떤 상태에서든 한눈에 바로 시간을 볼 수 없어서 생기는 불편함이 생각보다 꽤 크다.

  • 임팩트 : 이제야 쓸 만한 속도와 든든한 배터리. 내 손목에 멋스럽게 반짝이는 애플워치, 내가 애플이고 애플이 곧 나다.
  • 방출하게 된다면 그 이유 : 파손되거나, 배터리 수명이 심각하게 줄었을 때, 혹은 새로 나온 애플워치 시리즈 4에 대한 지름 욕구를 도저히 참지 못할 때. 애플워치 시리즈4가 바로 진정한 ‘2nd Genaration’ 애플워치라고 생각한다. 디자인부터 성능까지.

 

디자인으로 유혹당해 빠져들고 마는 애플의 늪

애플워치 시리즈 4가 11월 2일에 한국에도 정식 출시된다. 눈에 가장 먼저 띄는 부분은 페이스의 크기다. 기존 38mm가 40mm로, 42mm가 44mm로 화면이 더 커지면서 베젤이 줄었다. 두께도 11.4mm에서 10.7mm로 미세하게 얇아져 전체적으로 둔한 느낌이 많이 사라지고 유려해졌다. 외형은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에 스트랩 호환도 그대로 가능하다는 반가운 소식. 아무리 마진에 미친 팀 쿡이라도 워치 스트랩까지 호환성을 끊었다면 사람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을 거다(물론 그래도 판매량과는 상관이 크게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기존 애플워치를 차고 있는 사람들이 시리즈 4를 꼭 사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당연한 대답이겠지만, 내 생각은 ‘웬만하면 YES’다. 유려해진 디자인, 커진 화면, 정보를 더 많이 넣을 수 있게 된 워치 페이스, 진동 피드백이 생긴 디지털 크라운 등의 충분한 거시적 변화부터, 프로세서의 처리 속도 향상, 심지어 가속도 센서와 자이로 센서, 심박 센서도 업그레이드되어 좀 더 디테일한 움직임과 심박수 변화까지 포착 가능해져 위급 시에도 유용한 각종 헬스 케어 기능들까지. 매력적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기존 시리즈에 비하면 가격이 좀 오르긴 했으나 제값의 가치를 찾으려 혈안이 되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감을 채워줄 것이다.

 

애플워치 시리즈 4는 이런 사람에게 추천.

  • 궁극의 애플워치를 기다렸던 사람
  • 운동을 자주 즐기는 사람
  • 예쁜 손목시계를 처음 사려 하는 아이폰 유저
  • 아이폰 신제품은 너무 비싸서 엄두가 나지 않아 구매욕을 상쇄시킬 수 있는 다른 물건을 찾고 있는 사람

 

그렇다면, 굳이 사지 않아도 상관없는 이유 같은 건 없나? 있다.

  • 콘텐츠 소비에 적합하지 않은 작은 화면. 시간 확인과 알림, 운동 보조 및 제안 정도의 역할 그 이상의 대단한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확률이 높다.
  • 각종 부품과 성능이 대폭 업그레이드되었으나, 시리즈 3의 그것도 즐기는데 충분한 수준이다.
  • 예쁜 아날로그, 디지털 시계는 무궁무진하게 많다. 심지어 가격도 더 저렴하면서. 기존에 손목시계를 잘 착용하고 다녔다면, 굳이 애플워치를 고를 이유는 없다.
  • 많은 앱과 연락 하나하나의 알림에 목맬 필요 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면 애플워치가 딱히 필요 없다.

 

애플워치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생활에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패션 포인트가 아닐까 한다. 있으면 아주 좋고, 막상 없으면 살짝 허전하지만 참기 힘들지는 않은 그런 시계. 맥북, 아이폰, 아이패드도 비싸졌으니 이제 그나마 애플워치가 애플 제품 중에서 저렴한 축에 속하는 물건이 되었다. GPS 모델은 49만9천원부터, 셀룰러 모델은 61만9천원부터 구매할 수 있다. 좋은 판단을 하길 바란다. 나는 어떡할 거냐고? 우선 애플스토어 매장에 실물이나 구경하러 가야겠다. 그 뒤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기분 좋은 애플의 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