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상황에 쓰일 걸 상정하고 만들어지는 물건이라면 생김새도 그런 상황을 반영하게 된다. 뭐, 많이들 봐서 알지 않나. 충격 흡수를 위한 고무 패킹이나 시인성을 강조하는 노란 글씨 같은 것. 그 건조한 기능성이 백스핀처럼 조형적/미적으로 훌륭할 때도 있다. 유명한 그 말처럼 형태는 기능을 따르고 기능에서 기인한 형태는 나름의 멋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적지 않은 도시 남자들이 기꺼이 강인한 물건을 산다. 사실 본인의 실제 생활과는 아무 상관 없는 강인한 물건을 말이다.  마치 오프로드를 질주할 4륜구동 차를 타고 평생 도심에서 발렛 파킹만 맡기는 심리와도 비슷하다. 수염의 길이와 양말의 채도까지 관리하면서 사는 매끈한 남자들이라 해도 가슴속에서는 남자의 야망이 꿈틀댄다. 그러다 보니 산업용 기기의 기능적 요소들을 미적 요소로 치환하는 상품도 적지 않다. 말하자면 우리는 ‘관상용 남성성’이라는 신기한 장르를 만들어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는 아직 실전이라는 것이 있다. 거친 환경에서 견디기 위해 거칠게 생긴 것들이 아직 시장의 필요로 인해 생산된다. 오늘의 주인공 보쉬 ‘GML 18 LI’가 그런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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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보라. 무엇처럼 생겼는가? 놀랍지만 GML 18 LI는 라디오다. 우리가 찾은 가장 잉여력 넘치는 라디오 디자인이다. 사진에 보이는 다이얼을 이용해 주파수와 볼륨을 맞춰서 음악을 들으면 된다. 20개까지 라디오 방송국을 지정할 수 있으므로 만약 필요하다면 107.7 컬투쇼를 듣다가도 바로 93.1 명연주 명음반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단순한 라디오지만 무게는 무려 8.6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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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말고 다른 기능도 있긴 하다. 저렇게 거창하게 생겼는데 라디오만 된다면 내가 라디오라도 조금 멋쩍을 것 같다. 제품의 뒷면을 열어보면 SD/MMC 카드 슬롯과 USB 포트가 보인다. 해당 저장 매체에 들어 있는 음악을 각자의 포트에 연결해서 재생할 수 있다. 옆에는 외부 AUX 단자도 장착됐다. 시대가 요구하는 확장성 정도는 갖춰 둔 기계다.

보쉬는 오디오 전문 브랜드가 아니다. 이 라디오에게 깔끔한 음질이나 입체적인 음장감을 기대하는 건 기내식 소고기 요리에서 익은 정도를 조절하길 기대하는 것과 비슷하다. 기능이 하나도 없는 것도 아니다. 베이스를 강조하거나 이퀄라이저를 본인이 맞추는 것 정도는 된다. 웬만한 건 되지만 거기까지만 된다. 이유도 확실하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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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L 18 LI의 특기는 다른 분야에 있다. 대표적인 예가 본체를 감싸는 프레임이다. 이 알루미늄 프레임은 본체와 스프링으로 이어진다. 덕분에 (본사 발표에 따르면) 2m 아래의 콘크리트에 떨어뜨린 후에도 아무 문제 없이 작동한다. 2m 높이에서 떨어뜨려도 멀쩡한 정도의 내충격성/내구성은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조건과 기능이다. 이 특징이 역으로 이 물건이 있어야 할 곳을 명확히 지칭한다. 2m 높이에서 기계를 떨어뜨릴 수도 있는 환경, 그 바닥이 하필 콘크리트인 환경, 바로 산업 현장이다. 보쉬의 물건이 가장 많이 쓰일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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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GML 18 LI는 라디오 기능을 첨부한 배터리 충전기다. 정식 명칭도 ‘리튬이온 라디오 충전기’ 혹은 ‘미디어 차저’다. 보쉬의 리튬 이온 배터리 팩을 충전시키는 배터리 충전기가 내장되어 있어서다. 별도의 콘센트가 장착된 덕분에 멀티탭 역할을 할 수도 있다. 12V 소켓은 자동차 충전기와도 호환된다. 이 기계가 작업 현장에 전기와 음악을 제공하는 셈이다.

남자도 음악을 좋아한다. 하루 종일 나무를 깎고 드릴로 구멍을 뚫어야 하는 남자에게도 현악 4중주를 들으면서 일하고 싶은 성정이 있다. 이 기계는 그런 현장을 위한 물건이다. 남자다운 척만 하는 물건이 아니라 진짜 그 곳, 바로 그 현장에 있어야 하는 물건 말이다. 사실 이 라디오에서 슈베르트가 울릴 확률이 높지는 않을 지도 모르지만 노동의 효율을 올려 주는 물건은, 노동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만들어주는 물건은 그게 뭐든 칭찬받을 자격이 있다. 더구나 이렇게 진지하고 견고하게 만들어졌다면야. 가격은 20만원대. 물론 당신이 평생 사무실에서만 앉아 있을 팔자라고 해도 당신의 남성성을 나타내기 위한 제품으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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