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럴 때가 있다. 모든 게 복잡할 때, 일은 해야 하는데 두뇌를 풀가동해야 하는 묵직한 일들만 남았을 때.

그럴 때 잠시 머리를 쓰지 않는 단순한 일을 끄집어내 머리를 비운다.

 

쓸데없는 일도 좋다.
책상을 치우거나, 단순 데이터 정리를 한다든지…
그리고 최근엔 책상에서 종이를 자르기 시작했다.

 

 

이 지긋지긋한 팩스 스팸들

종이를 자른다고 해서 사무실에서 종이를 찢어발기거나, 칼로 난도질을 한다는 건 아니다. 이런 시도를 하게 된 건 인터넷에서 ‘전지(剪紙)’에 관한 글을 접한 후부터다. 전지는 중국의 전통종이공예로 접은 종이 등을 가위나 조각칼로 예리하게 잘라내 문양을 만드는 공예다. 흔히 붉은색 종이로 많이 시도하며, 기하학적인 무늬에서부터 사람, 동물에 이르는 다양한 그림을 잘라 만들기도 한다.

 

사무실에서 색종이로 대단한 작품을 만들 것도 아니고, 잠깐 머리를 식힐 용도니 이면지 함에서 이면지를 몇 장 가져오고, 자리에 놓인 미니인치 엑시져펜을 손에 들었다.

 

 

펜이 스마트폰 1/3무게라고 생각해보자.

일반 펜보다 살짝 짧은 느낌의 엑시져펜. 다른 무엇보다 이 펜의 첫인상을 가른 건 무게다. 가위가 들어있는 펜이라지만, 일반 필기구가 이렇게 무거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겁다. 무게는 약 60g. 지금은 묵직한 느낌에 반해 계속 쓰고 있지만, 처음엔 계속 써야 하나 망설였던 것도 사실이다.

 

엑시져펜의 뚜껑은 나사식으로 돼 펜을 쓰려면 뚜껑을 잡고 돌려야 한다. 처음에 낯선 뚜껑 방식에 놀랐지만, 옛날 펜들은 이런 방식으로 열기도 했단다. 레트로한 느낌을 느끼면서 뚜껑을 살살 돌렸다. 뚜껑을 열면 슈미트(Schmidt) 사의 635 미니 D1 리필 심이 반긴다.

 

리필 심의 길이는 66.9mm, 지름은 2.2mm로 이 규격(D1타입)과 맞는 리필 심을 갈아 끼울 수 있는 점은 좋다. Lamy M21, Mitsubishi SE-7, Uni Jetstream SXR-200 등이 대표적인 호환심이다. 기본으로 들어있는 슈미트 심은 종이와 마찰이 적고 흐름이 좋은 편으로 다른 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좋은 볼펜 심이다. 다만 10만원 가까이하는 펜의 기본 심으로는 뭔가 좀 뒷맛이 씁쓸하다.

 

 

내 휴가도 이렇게 부드럽게 흘러갔으면

펜에서 드러나는 묵직함과 부드러운 필기감. 그리고 살짝 두꺼운 느낌의 글씨는 세밀한 글씨를 쓸 때보다 큼직큼직한 그림, 선 긋기 등에 유리하다. 최근에는 결재 서류에 사인하는 용도로 쓰기도 한다. 제발 이번 휴가는 단번에 통과할 수 있기를! 휴가계를 미뤄놓고 본격적인 딴짓을 시작했다.

 

 

사무실에서 딴짓하기 첫 번째. 정사각형 형태로 자른 이면지를 세모로 접어 준다 2~3차례 접어 뿔 모양으로 만든 후 잘라야 할 부위를 엑시져펜으로 표시한다. 대충 잘라도 예쁘지만, 전지 도안을 찾아보면 많이 나오니 이를 참고하는 것도 좋겠다.

 

 

잘라낼 부분을 표시했다면 이제 이 부분을 예쁘게 자르면 된다. 뚜껑을 돌려서 닫아준 다음 뒷부분을 슬며시 힘줘 당기면 펜 안에 숨어있는 가위가 나온다. 가위는 안전잠금장치가 걸려있어 가위를 쓰고 싶다면 손잡이를 살짝 앞으로 밀어 잠금을 해제해야 한다. 엄지로 오돌토돌한 면을 살짝 밀어주자.

 

엑시져펜에는 실버, 그리고 블랙 색상이 있다. 색상에 맞춰 날의 색상도 다른데 이는 날의 재질이 조금씩 다른 이유에서다. 블랙 칼날은 테플론 코팅이 된 색이고, 실버 칼날은 니켈 도금이 된 색이다. 절삭력에는 큰 차이가 없다.

 

 

앞서 표시한 부분을 가위로 살살 잘라주자. 작은 미니 가위라고 하지만 가위는 가위다. 생각보다 훨씬 부드럽게 잘리는 종이를 보면서 엑시져펜의 절삭력을 다시 한번 생각해봤다. 날붙이로 장난치는 게 아니라는 어른들 말씀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다.

 

다만 휴대용 가위의 포지션이고 날이 길지 않으므로 ‘편하게’ 자른다고 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어디까지나 비슷한 크기의 가위보다 절삭력이 뛰어난 휴대용 가위라고 생각해야지 전문적인 가위로 쓰기는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엑시져펜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위를 사무실에서 얼마나 쓴다는 건지.

 

그런데, 막상 쓰다 보니 생각보다 괜찮다. 칼로 대체할 수 없는 가위만의 용도는 있는 법이고, 사무실에서 칼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가위는 생각보다 찾기 어려워 필통 한구석에 넣어두면 유용하게 쓸 수 있을 듯하다. 적어도 이렇게 사무실에서 딴짓하는 데 쓰지 않았는가?

 

 

펜으로 그은 부분을 따라 세심하게 잘라준다. 모든 부분을 잘라냈다면 끝. 이제 종이를 펼쳐서 예쁘게 만들어진 도형을 보며 잠깐 감탄하는 일만 남았다. 아 오늘도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며 딴짓 잘했다.

 

근데 내 휴가계가 도대체 어디 간 거지? 잠깐, 설마… 설마…

 

무게감
필기감
가위의 예리함
휴대성
다소 비싼 가격
박병호
테크와 브랜드를 공부하며 글을 씁니다. 가끔은 돈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