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 아니. 스마트폰 자판으로 글씨를 치는 데 익숙한 요즘이다. 덕분에 요즘 아이들 중에 악필이 늘었다고 한다. 손에 힘을 들이지 않고 글씨를 쓰는 데 익숙해져 필기구를 손에 쥐는 악력이 줄어들었고, 덕분에 필기구를 잘 다루지 못해 글씨를 예쁘게 쓸 수 없는 아이들이 늘고 있단다.

 

그래서일까? 필기구에 관한 관심도 예전만 못한 기분이다. 근래에 필기구 소식도 뜸하다. 갖고 싶고, 쓰고 싶은 필기구 소식보다는 기존 필기구에 새로운 옷을 입혔다는 소식만 가득이다. 그렇다면 직접 찾아야지. 써보고 싶은 필기구를 찾아왔다. 독일 필기구, e+m 우드펜이다.

 

 

나무를 깎아 만든 펜

e+m이라는 브랜드가 얼마나 생소한지. 게다가 + 특수문자는 검색도 잘 안 돼 브랜드를 찾아내는 데 애를 먹었다. e+m은 1899년에 설립돼 지금까지 4대가 이어 운영하는 전문 필기구 브랜드다.

 

뉘른베르크에서 Konrad Ehmann이 설립해 노이마르크트(Neumarkt) 지방에 공장을 세우고 다양한 형태의 펜대를 생산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공장이 파괴돼 재건했으나 이내 주 생산 품목을 바꾼다.

 

그게 바로 나무다. 4세대가 지나 1983년 현재 e+m을 이끌고 있는 Wolfram Mümmler가 나무를 이용한 필기구 제품군을 확립하고 e+m이라는 회사명을 확립했다. 여기서 e는 설립자 Konrad Ehmann를 따, m은 현재 오너인 Wolfram Mümmeler를 땄다고 한다.

 

 

e+m이 아니더라도 독일 필기구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유명세를 빌려 대부분의 공정을 중국이나 3세계에서 하고, 마지막 마무리만 독일에서 마치고 Made in Germany를 다는 얌체같은 브랜드도 있다. 하지만 e+m은 아직 독일 자체 생산 시설에서 직접 제조하고 있단다.

 

 

FSC 마크도 눈여겨봐야 한다. 나무를 이용해 제품을 만든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무를 훼손해야 한다는 소리다. FSC는 이와 관련된 마크로, 산림에서 생산된 목재, 목재 제품이 지속가능한 환경에서 제작된 것인지 인증하는 마크라고 한다. FSC는 1993년 설립된 국제 비정부단체인 산림 관리 협의회(Forest Stewardship Council)의 약자로 여기서 구축한 산림 경영 인증 시스템이 유럽과 북미 등 확산 중이라고 한다.

 

FSC 마크를 받기가 꽤 까다롭다고 한다. 산림을 이용하는 대신 그만큼 산림을 신경 써야 하고, 이 과정을 검토하는 절차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e+m은 FSC 마크를 획득했으니, 적어도 제품을 쓰면서 나무에게 미안해야 할 일은 없겠다.

 

 

e+m으로 글씨를 쓰다.

e+m에서는 꽤 다양한 제품군을 선보이고 있는데, 다양한 제품을 쓰면서 매력적인 제품을 몇 가지 꼽아 열심히 써봤다. e+m 전체 제품의 첫인상은 아날로그의 느낌과 남성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중후한 필기구. 각기 다양한 용도로 활용한 제품의 느낌은 어땠을까?

 

 

1) Style.us Pens
e+m에서 부담없이 쓰기 좋은 가장 가벼운 미니펜을 꼽으면 Style.us Pen을 꼽겠다. 후술하겠지만, 다른 펜이 묵직한 느낌을 자랑한다면 이와 달리 Style.us Pen은 가볍고 경쾌한 느낌이다. 시중에 나온 일반 볼펜보다도 작은 크기로, 접었을 때는 길이가 110mm, 폈을 때는 120mm에 불과하다. 굵기도 가늘어 쥐는 느낌이 어색할 수도 있다.

 

 

Style.us Pen의 특징은 끝에 달린 교체 가능한 스타일러스 팁. 용도는 짐작할 수 있다시피 스마트 디바이스를 터치하는 일이다. 이제와 누가 이런 터치펜을 쓰냐고 타박하지 말자. 최고의 터치펜은 여전히 손가락일 수 있지만, 메모 중 스마트폰을 잠깐잠깐 만질 때는 아직 유용하다.

 

터치펜을 사는 게 아니라 원목 재질의 좋은 펜을 샀더니 터치펜이 따라오는 것이다. 원목 바디는 아프리카의 흑단이라 불리는 웬지(Wenge, 혹은 웽게), 제브라노(Zebrano), 월넛(Walnut) 재질이고, 터치펜은 동(Copper), 황동(Brass) 등이 쓰였다.

 

 

펜은 D1타입 펜심을 쓰고 있으며 교체는 어렵다. 필기감은 부드러운 유성 볼펜과 비슷하다. 살짝 짧은 바디와 뒤로 넘어가는 무게 중심에 적응해야 하지만, 휴대성이 뛰어난 건 다른 펜과 비교했을 때 Style.us Pen 만의 장점이다.

 

 

2) Melange Pen
혼합물이라는 뜻을 가진 Melange라는 단어처럼 Melange 펜은 e+m에서 내놓는 펜 중 가장 다양한 재질을 활용했다. 그래봤자 나무, 금속에 가죽을 덧댄 게 고작이지만 말이다. Melange에는 e+m의 다른 펜에서 볼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손으로 잡는 부분을 노끈처럼 보이는 게 감고 있는데, 이건 끈이 아니라 가죽 재질이다. 그리고 끈으로 감긴 게 아닌 가죽으로된 링이 바디에 끼워져있는 형태다.

 

 

재질의 특성 상 쓰다 보면 부스러기가 일어난다. 쓴 지 2주가 다 됐지만 아직도 종이 위에 슬금슬금 남는 부스러기를 보면 글씨를 쓰고 손으로 털어내는 일은 계속될 듯하다. 대신 손으로 쥐는 느낌은 확실하다. 짧은 펜이지만, 굵은 바디는 손에 안정적으로 잡히며, 여기에 가죽링이 정점을 찍는다. 적당히 묵직한 느낌 또한 인상적. 책상 위에서도 쉽게 굴러가지 않는 점도 깨알같이 만족스럽다.

 

 

황동으로 된 끝을 부드럽게 돌리면 펜끝에서 펜촉이 나온다. 내부에는 슈미트(SCHMIDT) 사의 P900 볼펜심을 썼다. 인터넷에서 4천 원 내외로 살 수 있는 리필심이며, 국제 표준 크기이므로 원하는 필기구 브랜드의 표준 크기 볼펜심으로 바꿔써도 좋다.

 

슈미트 P900은 유성볼펜 특유의 필기감을 갖췄다. 너무 무르지 않으면서도 부드러운 필기감을 갖췄으며, 잉크의 점도가 높은 편이다. 고점도 잉크를 쓰는 만큼 1.0mm의 심굵기는 사용자에 따라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세밀한 필기를 위한 펜은 아니며, 큼직큼직한 글씨를 쓰거나 서명할 때, 혹은 드로잉에 쓸 만하다.

 

 

3) Drake
좀 더 묵직한 Drake를 살펴볼 차례다. Melange와 비교하면 손으로 잡는 부분이 좀 더 도톰하다. 덕분에 무게도 살짝 무겁다. 하지만 글씨를 쓰면서 체감 무게는 상당히 무거워진 느낌인데, 이는 무게 중심이 뒷쪽에서 앞으로 자리를 옮긴 덕분이다.

 

유선형 디자인은 나무 특유의 재질감과 만나 매력적인 그립감을 자랑한다. 나무 무늬가 유독 도드라지는 이 재질은 제브라노(Zebrano) 나무로 선명한 무늬가 특징이라고 한다. 비슷해보이지만, 같은 무늬의 펜은 없는 독특한 무늬가 우드펜 만의 특징이다.

 

 

앞서 본 슈미트 P900 리필심이 쓰였다. 고점도 잉크는 필기감이 뻑뻑한 경향이나 슈미트 P900은 부드러운 필기감을 갖췄고, 펜 자체 무게 덕분에 꾹꾹 눌러 쓰지 않아도 글씨를 쓸 수 있어 손의 부담 또한 조금은 덜었다. 하지만 역시 무게가 무게인지라 오래 필기하기엔 부담스럽다.

 

 

e+m의 다양한 볼펜 중 우드펜의 본질을 가장 잘 담은 펜을 꼽자면 Drake를 선택할 것 같다. 나무 재질의 느낌과 곡선을 담았고, 과하게 장식적이지도 않다.

 

 

4) Graphite Pencils
e+m에서는 볼펜 만큼이나 연필 관련 제품도 많다. 연필을 끼우는 홀더 제품이나 연필심을 끼워서 쓰는 제품까지. Steel은 흑연 연필심을 끼워 쓰는 일종의 연필심 홀더다.

 

 

강철이라는 이름처러 처음 Steel을 들면 강철같은 단단함과 묵직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연필이 이렇게 무겁다니. 마찬가지로 세밀한 필기로는 권하기 어렵다. 드로잉에 쓰거나 마인드 맵, 브레인스토밍처럼 흘려 쓰기 좋은 내용을 쓸 때나 활용할 수 있을 듯하다.

 

생각보다 연필심이 무르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HB 연필심이라고 한다. 연필심 굵기가 굵어 글씨도 조금 투박하게 나오는 편이다. 이래저래 세필은 쉽지 않겠다. 심이 굵어 웬만한 충격엔 쉽게 파손되지 않겠다 싶다.

 

 

Steel에서는 함께 있는 자에서 나무를 찾아볼 수 있다. 자의 소재는 앞서 본 제브라노 나무다. 자의 용도는 그뿐만이 아니다. 한쪽 끝을 보면 연필 심을 깎을 수 있는 부분이 있어 연필심을 관리할 수 있다.

 

 

e+m은 결이 살아있는 나무의 느낌과 묵직한 금속의 느낌을 잘 살려낸 필기구 브랜드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펜을 원한다면, 그러면서 묵직한 필기구를 좋아한다면 기꺼이 써보고 싶은 필기구가 될 것이다.

제품 디자인
필기감
보기 힘든 특별함
심굵기의 투박함
박병호
테크와 브랜드를 공부하며 글을 씁니다. 가끔은 돈을 씁니다.